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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Feb 19. 2023

가장 진도다운 브랜드가 되고 싶어

곽그루, 여기 앉아봐라.


아까 오후에 아빠가 근엄한 목소리로 잠깐 앉아보라 하셨다. 그리고는 1월부터 12월까지 올해 계획을 말해보라 하셨다.


1월과 2월은 지났으니... 3월부터 12월까지 일상적인 계획들을 적어본다. 우리는 방앗간도 하니까 '기름집중기간'도 넣어보고... 올해부터는 체험도 하기로 했으니까... 하면서 이런저런 계획들을 적어 넣었다.


당당한 목소리로 엄마아빠에게 브리핑을 했는데, 영 표정이 좋지 않으시다.


넌 너무 하고 싶은 게 많아.

넌 지금 생각이 너무 많아.

그래서 네가 지금 하겠다는 게 뭐야?

우리가 지금 집중해야 하는 게 뭔데?


내가 설명을 잘 못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정작' 하고 싶은 것이 없었던 것인지.




2015년 '진도농부미스팜' 시절부터였으니 올해로 벌써 8년을 채웠다. 그 8년 동안 수십 가지 작물농사도 지어봤다가, 스마트팜에도 기웃대봤다가, 카페도 기웃대봤다가, 주말장터도 기웃대봤다가, 농장체험도 기웃대봤다가 말 그대로 발만 담근 채로 기웃기웃 대기만 해봤다.


나름 합의를 본 것이 '여름에는 고춧가루, 겨울에는 절임배추'였다. 그런데 고추농사도 그렇고, 배추를 절여 보내는 것도 그렇고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고추는 농사의 '만렙'이고, 절임배추는 '병신이 되어서야 그만둘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래. 절임배추는 언젠가는 접어야 할 사업이고, 농장에는 손님들이 자주 놀러 오시니 치유나 체험 쪽으로 해봐야겠다.라는 마음으로 재작년에는 1년 동안 순천까지 왔다 갔다 하며 6차 농업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때 '가장 진도다운 브랜드를 만들자'는 강박 비슷한 다짐이 생겼다. 진도에 놀러 오는 여행객들이 필수로 찾는 진도핫플을 만들어야지, 싶었다. 그런데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아니, 외면하고 있었다.


1. 진도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수가 충분한가? (여름바캉스 시즌 외에도 상시적으로, 정기적으로)

2. 농업을 하면서 체험객을 맞이할 수 있는 인적여유가 충분한가?

3. 가장 중요한 것. 우리 가족들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1. 코로나 직전, 송가인과 쏠비치의 덕을 받아 진도는 '반짝' 특수를 누리고 있다. 여름 바캉스 철에는 진도읍내 식당들이 줄을 설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이 또한 코로나가 거의 끝난 작년부터는 시들해지고 있는 것 같다) 진도 밖 여행객들이 주 고객이라면 망하기 쉽다. 그렇다고 진도 주변에 큰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다.


2.  '텃밭샐러드체험'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한 달도 다 채우지 못하고 접었다. 사람을, 특히 아주 어린아이들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기존 농사일과 병행하려니 이도 저도 잘 되는 것이 없었다. 아직은 농사가 주 사업이다 보니, 체험한다고 준비물만 잔뜩 사놓고 접었다.


3. 사람들을 좋아하는 진도농부 식구들이지만 사람들을 상대하며 정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우리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에너지는 논과 밭의 작물들과 고양이들에게 쏟기에도 빠듯하다. 체험농장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게 되면 농업(작물재배업)보다는 서비스업이 될 텐데, 그 기 빨림을 견딜 수 있을까?


그래서 곧바로 접었다. 체험농장이네, 교육농장이네, 치유농업이네 하는 것은 쳐다도 보지 말자고 생각했다. 돌고 돌아 농사에 집중하자. 농사에 집중하고 판매에 집중하고 고객에 집중하자. 그러면서도 자꾸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진도핫플'에 대한 미련이 그림자처럼 남아있었다.


그러다 작년 겨울.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힘든 농사일에다 절임배추 작업까지 하다 보니 엄마의 온몸이 고장이 난 것이다. 삐그덕거리며 쌓인 통증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터져버린 것이다. 결국 올초까지 몇 달에 걸쳐 수술을 받게 되었다. 천천히 회복 중이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농사철이 다가오면 엄마의 몸은 또다시, 이 전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를 것이다.


머릿속이 번쩍거렸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엄마가 아프고 나서야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진짜로'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생뚱맞은 것들을 새로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컸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 욕심을 버리자. 마음을 비우자.


여전히 올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들은 여름의 고춧가루와 겨울의 절임배추이지만, 전부다 우리가 해야 한다는 미련한 고집을 조금만 내려두자. 맡길 건 맡기자. 다른 사람의 손이건, 자동화할 수 있는 기계이건.


절임배추는 10년 이상 데리고 갈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니, 차츰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시점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진도핫플'의 미련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아마 살랑거리는 봄바람의 기운덕인 것 같다.


가장 진도다운 브랜드가 꼭

1. 진도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수가 충분한가? (여름바캉스 시즌 외에도 상시적으로, 정기적으로)

2. 농업을 하면서 체험객을 맞이할 수 있는 인적여유가 충분한가?

3. 가장 중요한 것. 우리 가족들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이 조건을 만족해야 하던가?


내가 원하는 '가장 진도다운 건' 뭘까?

그걸 왜 원하는 걸까?


진도! 하면 떠오르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 왜?

여행이나 일 때문에 진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진도다운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다. 왜?

진도에 대한 기억이 좋았으면 좋겠다. 진도를 떠올렸을 때 행복했으면 좋겠다. 왜?

내가 진도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진도농부의 수익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도농부는 궁극적으로 진도의 수많은 브랜드(특히 청년브랜드)를 잇는 플랫폼이 될 것이다.


어느 지역에 여행을 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음식'과 '사람'이었다.

그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 그 철에만 먹을 수 있는(혹은 가장 맛있는) 음식.

그 지역에서 새로 인연을 맺게 된 좋은 사람들과의 기억.

이런 것들이 그 지역의 인상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요즘 내가 정리한 가장 진도다운 브랜드, 진도의 제철을 담은 브랜드, 진도농부 2.0이 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진도의 제철농수산물을 판매한다.

2. 진도의 제철농수산물로 만든 가공식품(김치류, 장아찌류, 피클, 과일청 등)을 판매한다.

3. 진도의 제철가공식품 만들기 체험을 판매한다.

4. 진도의 제철농수산물과 가공식품을 활용한 원테이블 팜다이닝/팜파티 서비스를 판매한다.


1~4번의 특징은

- 상시가 아닌 철마다 구성이 달라지며,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람도 여러 번 방문할 수 있다.

- 상시가 아닌 시즌성 활동이기 때문에, 상시고용에 대한 부담이 적다.

- 전문 '공간'을 마련하기 전에 팝업스토어처럼 부담 없이 테스트할 수 있다.


그래서 올해의 목표는 고춧가루 5,000근과 절임배추 5,000박스 판매 그리고 제철상품(가공품과 체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 엄마아빠에게 지어주겠다고 약속한 '제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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