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델리 Jan 31. 2017

새해 같지 않은 새해

새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때


1월 _ 아직 차가운 겨울



올해도 변함없이 새해가 밝았다. 가는 해를 잘 보내고 오는 해를 잘 맞이하자며 눈길 닿는 곳마다 훈훈하고 떠들썩하다. 나에게 새해란 가족과 모여 앉아 자정 무렵 TV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를 듣는 날이라는 것 외에 큰 의미는 없다. 물론 다음날 아침에 떡국은 맛있게 먹는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그래도 타종은 같이 봐야지!"라는 엄마의 타박에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생각했다. 이게 다 뭔 소용인가. 새해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어제가 오늘과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데,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은 새해의 시작이라니.


무한정 흐르는 시간에 금을 긋고 오늘까지는 몇 년도, 내일부터는 그다음 해로 하기로 했다, 라고 정하는 게 일종의 집단 최면 같았다.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보신각에 모인 사람들의 흥분된 웅성거림을 들으며 이상하다고 웅얼거렸다. 그래도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였던 터라,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의아함을 떨치고 일어나 떡국 한 그릇을 해치우고 남들처럼 새해 계획을 세웠다.


보통의 새해 계획처럼, 주로 공부(특히 외국어), 운동(때로 다이어트와 함께), 여행, 악기나 그림 배우기 등으로 채웠다. 그리고 역시 남들처럼 초반 몇 개월도 못 채우고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왜냐하면 1년이란 계획한 모든 것을 성실히 수행하기엔 긴 시간이지만, 어떤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여 새해 계획을 세우고 난 뒤 1년 동안 1분기에는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했다가, 2, 3분기를 지나면서 계획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조차 새카맣게 까먹고, 4분기에 들어서는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마저 냉소적이 되고 만다. 내가 그렇지 뭐. 그런 사이클을 수십 번 반복하고 나서도, 매년 초만 되면 "이번에는 기필코 (부들부들)" 중얼거리며 다시 계획을 세우는 건 왜인지.


새해와 새해 계획에

모두 심드렁해진 이십 대 후반쯤,

더 이상 신년 계획 따위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결심도 계획처럼 지켜지지 않았다. 호주의 뜨거운 여름. 이글이글한 태양에 지쳐 시원한 마트를 전전하던 어느 날, 우연히 손에 닿은 한 잡지에 실린 "33살 전에 할 33가지 일들"이라는 리스트를 보고는 다시 계획 세우기에 혹해 버렸다.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20대에 해야 할 일 50가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101가지 등 온갖 버킷리스트를 찾아 하기 싫거나 이미 해본 것들은 버리고, 좋은 것만 잘 모아 구매한 잡지에 있던 리스트와 잘 버무려서 나만의 "33살 전에 할 33가지 일들" 리스트를 만들어냈다. (원래 잡지에 있던 리스트가 영어라 공부하는 셈 치고 어설픈 영작으로 겨우 완성)


그리고는 일기장에 잘 적어놓고 잊어버렸다. 그 일기장을 들고 여기저기 더 여행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잠시 백수 생활을 하다가 한 회사에서 일을 시작해 2년 반을 일하고 지금의 회사로 옮겨 다시 2년을 더 일했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하루하루 충실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내 시간을 한 움큼 훔쳐간 기분이다. 나는 리스트를 만들었던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데 서른셋이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남들은 새해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한 연초에 나는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낡은 리스트를 되짚어본다.




33 THINGS TO DO BEFORE 33


1. Learn a  foreign language. Not just the sweary parts.

_ 뭐 적어도 영어는 욕 이상 하니까.

2. Read 50 books a year including a big Russian novel. Oh, and don't forget the Bible.

_ 안타깝게도 1년에 20-30권 정도밖엔 못 읽었고, 두꺼운 러시아 소설이나 성경은 손도 대지 못했다.

3. Draw something.
_ 꾸준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끄적끄적 그리기는 계속하고 있다. 올 초에는 드로잉 수업을 받았다.

4. Write something.

_ 일기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브런치를 시작해 꾸준히 글을 쓰려고 노력 중이다.

5. Learn to play the guitar.
_ 중간에 배우려고 시도는 해보았으나 손이 너무 아파서 실패. 우쿨렐레를 배울 걸 그랬나.

6. Learn a song which I can sing anytime with confident.

_ 노래는 원래도 못했지만 부를 일이 없어서 점점 음치가 되고 있다. 어흑흑.

7. Learn to drive, and go for a drive.

_ 드라이브는 좋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분간하지 못해 앞으로도 운전은 힘들 것 같다. 나와 동승자의 목숨은 소중하니까.

8. Learn something I don't need to know.
_ 원래는 천문학이나 식물이름 같은 걸 알아보자는 취지였는데, 뒤집어 보니 세상엔 쓸데없는 게 없더라.

9. Make a recipe book with my 10 best dishes.
_ 레시피 북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대략 10가지 정도는 뽑을 수 있다. 단지 그 10가지가 다 파스타일 뿐.

10. Drink something I've never tried before.

_ 한국에 돌아오니 외국에서도 못 마셔본 외국 맥주가 많아서 몇 가지 마셔보았고, 와인도 가끔 즐겨 마실 수 있게 되었다.

11. Get another degree.
_ 한국에 돌아오면 대학원에 진학할까 하였으나, 고비용 저효율로 접었다. 앞으로도 대학원은... 글쎄.

12. Get a plant, and try my best not to kill it.
_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완벽한 실패. 꽃집에서 멀쩡하던 식물이 나와 함께 있으면 죽는 까닭은, 아마도 사랑하던 다른 식물들과 헤어진 슬픔 때문일 것이다.

13. Buy an original work of art.

_ 라오스에 갔을 때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서 액자를 해 벽에 걸어놓고 가끔 멍 때리며 본다. 비록 그림 가격보다 액자 가격이 더 들었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주는 멋진 그림이다.

14. Travel to all the Asian countries that I haven't been to yet.
_ 모든 아시아 국가들... 은 솔직히 무리라고 리스트를 만들 때 이미 실패를 예측했다. 하지만 어쨌든 여행을 계속했고, 그동안 이런 나라들에 다녀왔다 : 일본(오사카), 타이완, 홍콩, 인도네시아(발리), 캄보디아, 라오스,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호치민), 터키

15. Commit to frequent immaturity.

_ 이건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다'와 같은 평범한 것에서부터 '한밤중에 알몸으로 수영한다'까지 굉장히 넓은 범위의 예시가 있었다. 나는 수영장에 가면 꼭 캐논볼을 하거나 분수를 보면 맨발 벗고 들어가 애들이랑 같이 뛰어노는 것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16. Properly celebrate birthdays.

_ 나이를 먹는 건 멋진 일이지만, 매년 생일을 축하하는 건 지겹기도 하고 질리는 일이다. 그래도 매년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조촐한 파티를 했고, 페이스북에 쌓인 축하 메시지들을 기쁜 마음으로 읽고 답했다.

17. Say "I love you" everytime it's appropriate, and  sometimes when it's not.

_ 특히 가까워서 더 소홀할 수 있는 가족들에게, 자주 안부를 전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했는데 마음만큼 안될 것 같다. 앞으로 더 노력해야지.

18. Find someone who I love and loves me back.
_ 이것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성공!

19. Have an interest in the domestic & international  situation.

_ 국제 문제나 국내 사회/정치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정보를 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사주간지를 하나 구독하고 있고, 시간이 많은 주말 오전에 몰아 읽곤 한다. 읽을수록 약간 냉소적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듯.

20. Be financially smart.

_ 저축을 열심히 하고 있다. 어설픈 투자로 돈을 날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21. Get a new hairstyle every year.

_ 한국에 와서 곱슬머리로 변신을 한 번 했고, 이후로는 앞머리를 내었다가 길렀다가 하고 있다. 뭐,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단백질만 충분하다면 머리는 자연적으로 길어지니까.

22. Be someone always say "hello" first.
_ 늘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를 잊지 않도록 노력한다.

23. Live by faith. Pray everyday.
_ 한국에 돌아와서 우연한 계기로 세례를 받았다. 원래 신앙과 종교는 별개라고 생각해 왔지만, 자연스럽게 다가온 기회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아직 종교를 완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워서, 병아리 날라리 신자고 물론 매일 기도하진 않지만, 하루하루 감사하며 지낸다. 신의 보살핌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운 좋은 날들을 보냈고, 또 보내고 있기에.

24. Say "wonderful" and "beautiful" as many  times as possible.

_ 솔직히 한국에 돌아와서 이런 말 잘 안 하게 된다.

25. Decide for myself even if it's just a tiny little thing.

_ 인생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오롯에 내 책임이 되고 남 탓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도 내가 결정한다. 특히 짜장인지 짬뽕인지 결정할 때 그렇다.

26. When I have a conversation, give them a respect and concentration they deserve.

_ 늘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노력한 만큼 상대방에게 가닿는지 모르겠다.

27. Make new friends every year, and tell my old ones how awesome I  think they are.

_ 한국에 와서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그중 몇몇은 떠나보냈다. 그 와중에도 곁에 남아준 친구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애정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28. Upload all the travel photos and stories in my blog and facebook.

_ 블로그나 페이스북보다 브런치가 좋아서, 브런치를 통해 조금씩 올릴 예정이다.

29. Get 5 certificates of whatever kind I like.

_ 따고 싶은 자격증을 2개 정도 땄다. 앞으로 2개 정도 더 공부해서 딸 예정이다.

30. Work out steadily, and finish the Grand Circle of Seoul.
_ 요가를 시작해서 꾸준히 한지 3년째. 체중이 줄거나 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확실히 전에 비해 몸을 움직이는 걸 즐기게 되었다. 날씨가 좋을 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한 달에 한 번쯤 엄마와 둘레길을 걸었다. 북한산 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을 완주했다.

31. Be active for the society! Volunteer for a charity!

_ 이거 진짜 해야 되는데. 다음 리스트로 옮겨 가야겠다.

32. Never get tired of learning from experiences in life.

_ 가끔 다 놔버리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가까스로 붙잡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때로 인간관계에서 상처받고, 남들에 비해 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은 시간이 지나도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다. 삼십 대에 들어선 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앞으로 무얼 하면 좋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그래도 그 모든 경험으로 말미암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33. The last and most important thing : smile often, laugh lots, HAVE FUN!

_ 이건 늘 지켜야 하니까 남겨둬야지.




33개 중에서 16개를 꾸역꾸역 지워냈다. 만들어 놓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리스트 덕분에 매년 계속되는 '새해 계획 세우기'라는 고통의 굴레에서 죄책감 없이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되는대로 살다 보니 평생 살면서 가질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종교)이나,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장기 연애)도 생겼고, 결과적으로 전보다 좀 더 잘 살게 되었다.


이 리스트를 만들 때의 나는 외국에 있었고, 한국에 돌아갈 날이 기대되면서도 두려웠다.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그때 것 지내온 시간이 시간낭비라고 말할 사회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낼지 고민이 많았다.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나는 계속해서 여행을 하고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관계에서 고통받고 또 치유받으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바람을 담아 리스트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 조악한 리스트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세세한 계획서는 아니었다. 향후 몇 년 간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한 맥락적 가이드라인이었다. 어쨌거나 이 리스트 덕분에 나는 계속해서 여행을 하고 다양한 걸 배우려고 시도하고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가끔 어린애처럼 장난을 치고 매년 생일을 축하하며 나름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이제 오랜 리스트는 안녕. 새로운 리스트로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해 본다. 모쪼록 앞으로도 계속해서 여행을 하고 다양한 걸 배우려고 시도하고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가끔 어린애처럼 장난을 치고 매년 생일을 축하하며 나름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길. 그리고 전보다 조금만 더 자연스러워지고 편안해지고 똘똘해지길 욕심내 본다.

 



12 THINGS TO DO BEFORE 40


1. Travel every year to the countries or cities where I have not been to yet.

2. Learn a foreign language. To be specific, learn Spanish to a conversational level.

3. Complete the list of books I read upto 1000.

4. Draw something. Make one drawing diary per a year.

5. Write something. Finish to write all the travel logs, and make a book out of it.

6. Learn something that I don't need to know, but interesting.

7. Properly celebrate birthdays, and commit to frequent immaturity. (Not necessarily just on  birthdays, but go ahead if there's no option.)

8. Exercise everyday, and have health checkups regularly. If there's nothing wrong on the result, do not worry about health too much. (Try, "at all.")

9. Be financially smart, and find a place to build a better life.

10. Be active for the society and the world! Volunteer for a charity!

11. Never get tired of learning from experiences in life.

12. The last and most important thing : worry less, laugh lots, ENJOY THE RIDE!



ImageⓒPEXELS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에 대한 집착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