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둘째 주 비버 이야기
도착한 다음 주부터 일을 시작했다. 아침에 일찍 래리 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가게로 나가서 8시간 근무를 하고 오후에는 일찍 퇴근하는 래리의 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눈이 잔뜩 쌓인 거리는 아직 걸어 다니기는 너무 추웠다. 걸어서 나오는 열보다 찬 공기가 훨씬 더 세서 10분 정도 밖에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허벅지가 탱탱해졌다. 왜 하필 허벅지가 탱탱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추웠다가 따뜻한 곳으로 들어오면 몸이 벽난로 위에 놓인 초콜릿처럼 녹아내렸다. 온몸의 수분과 피와 뼈와 근육이 잘 녹은 초콜릿처럼 부드럽게 침대 위로 흘러내리면, 노곤 노곤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여기선 사람들과도 금방 가까워졌다. 아니, 가까워져야만 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모두 헤아려도 20명이 채 안되었고, 워홀로 온 사람도 5명뿐이었다. 다들 같이 일하고 같이 살고 같이 노는 사이니까, 서로서로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옐로나이프에서 지내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 번뿐인 경험이었다. 이 시간과 이 사람들이 무척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타인과 가까이 지내본 적이 없어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눈 덮인 평원을 달려 멀리멀리.
일요일에 햇살이 창문 가득 들어왔다. 햇살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같이 살던 친구들이 래리에게 차를 빌려 같이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길래 냉큼 따라나섰다. 여기 와서 캐나다가 눈 치우는 데는 일인자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더 살다 보면 그 말을 종교처럼 믿게 될 것 같았다. 밤이든 낮이든, 눈이 얼마나 오든 간에 도로는 늘 통행에 문제가 없도록 치워져 있었으니까. 마법처럼.
나무나무나무... 눈눈눈... 달리고 달려도 지치지 않는 풍경이 계속 따라왔다. 포대자루가 있다면 미끄러져 내려오고 싶은 눈 언덕도 있었고, 눈 때문에 몰랐지만 사실은 호수였던 곳도 있었다. 날씨가 계속 변하는 건지, 아니면 구름이 끼어 있던 저곳과 지금 와서 서있는 이곳이 너무 멀어서 그런 건지, 하늘의 색이 계속 변했다. 하늘의 색이 변하면 풍경의 톤도 변한다. 해가 조금이라도 나와있으면 구름과 어울려 오묘한 색의 물결을 만들어내고, 해가 없으면 아득하게 포근한 눈밭이 펼쳐졌다.
눈으로 덮인 호수를 지나고, 눈으로 덮인 언덕을 지난다. 북극곰 번호판이 붙은 차의 시동을 켜놓고 산책에 나섰다. 눈 위에 발자국을 푹푹 찍어가면서 용감하게 나섰는데, 길을 잃을 것 같다. 이 나무가 저 나무 같고 아직 가지 않은 저 앞에 발자국도 내 것 같다. 앞선 누군가의 발자국을 내 것처럼 따라가며 걷고 또 걸었다.
잠시 잊고 있던 추위가 스멀스멀 올라와 온 몸을 덮치자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먹은 사람처럼 머리가 띵해져서 눈밭을 허우적거리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갔다. 꽁꽁 언 몸을 아직 시동이 꺼지지 않은 차에 굴려 넣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동안에도 꽁꽁 언 몸이 녹지 않아 온갖 따뜻한 것들을 떠올렸다. 따뜻한 침대와 따뜻한 차, 뜨거운 핫 초콜릿, 뜨거운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와......
지금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이 눈밭을 상상하려고 노력해본다. 높게 선 나무 사이사이 낀 눈 덩어리, 신발이 푹푹 빠지던 눈 밭과 그 추위. 손끝부터 시리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바지가 점점 끼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내 신체의 한계를 시험하던 그 추위. 눈가의 눈물이 곧 얼음이 되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기분을 상상해 본다. 그때처럼 그 추위를 온전히 느껴보려고 애를 써본다. 시간이 지나니 그런 추위마저 그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