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셋째 주 비버 이야기
옐로나이프에서의 삶은 여러모로 달랐다. 수돗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것은 같았지만, 한국 집에서처럼 수돗물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올드타운에는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서 집집마다 지하에 물탱크를 하나씩 두고 물문제를 해결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커다란 물차가 와서 물탱크에 물을 보충해 주었다. 살던 집에 래리와 부인 다이앤, 그리고 나를 포함해 3명의 워홀러가 살고 있었는데, 다들 매일 씻고 요리를 해도 크게 부족하진 않았던 것 같다.
오후 다섯 시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동네라 밤에 잠이 안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면 가끔 집 아래 얼마나 큰 물탱크가 있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겠지. 안에서 수영도 할 수 있을 거야. 물탱크 청소는 어떻게 할까. 일 년에 몇 번이나 할까. 물을 몽땅 쓰게 되는 날이 오면 그 기회를 틈타 청소를 하는 걸까.
나중에 사람이 많아져서 한 두명 정도 집에 더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물차가 오기 하루인가 이틀 전에 물이 동났다. 마실 물은 커녕 씻을 물도 없어서, 각자 재활용하려고 모아둔 2리터짜리 주스통을 들고 출근해 가게에서 물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그런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씻을 때마다 욕실에 주스통을 들고 들어가서 세면대에 조심스레 물을 따라놓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언젠가 외국에서 설거지하는 영상을 본적이 있었다. 영화였는지 뭐였는지는 기억은 안나지만, 싱크대 혹은 큰 그릇에 물을 받아서 세제를 풀고 설거지 거리를 넣고 브러쉬로 문질러 닦은 다음 대충 헹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가끔은 거품이 묻어 있는 상태로도 닦더라. 한국에서는 아니 어떻게 저럴수가! 충격에 빠졌지만, 옐로나이프에서 몇 주를 보내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그 집도 물탱크를 집 아래 두고 살았나 보구나. 물차가 오기 전에 물이 동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적은 물로 설거지 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겠지.
비록 한 번도 실체를 본 적은 없었지만, 물탱크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아쉬운 점은 물맛이 그닥 좋지 않다는 것.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쇠 맛이 났다. 맛도 없고 찝찝해서 결국 물을 점점 멀리하게 됐다. 래리와 다이앤은 물 대신 프레스카라는 레몬 맛 탄산음료와 핑크 자몽 주스를 섞어서 마셨다. 물보다 탄산음료가 더 싼 캐나다에서는 경제적이고 맛 좋은 선택이었다.
한국에 있는 엄마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물대신 탄산음료라니, 건강에 나쁘다며 잔소리를 했다. 엄마가 반은 농담처럼 반은 진담으로 거기 눈도 많은데 녹여서 마시라고 했다. 처음엔 웃고 넘겼는데, 생각해보니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집 앞에만 해도 눈 언덕이 여기저기 있고, 여기는 오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만큼 청정지역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공짜니까.
정말로 나가서 눈을 파먹어볼까 싶어 래리와 다이앤에게 말했더니 다이앤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여기 눈은 너무 건조해서 물 한 잔을 마시려면 양동이 하나 가득 녹여야 할 걸!"
과연 다이앤의 말이 옳았다. 북쪽의 눈은 너무 건조해서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가벼웠다. 눈밭에서 뒹굴다가 눈에 옷이 젖을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양동이만큼 퍼서 옷속에 쏟아부을 게 아니라면 옷이 젖을 일은 없었으니까.
털면 날아가는 눈을 상상하기 어렵다면 맛소금을 떠올리면 적당하다. 그래서인지 옐로나이프에서 더 오래 지낸 사람들은 눈을 터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면 그냥 가볍게 녹아 사라지기 때문에. 아주 적은 양의 수분이라 녹고나면 금방 말라버려서 말그대로 '사라져 버린다'.
물을 공짜로 마셔보겠다는 야무진 꿈은 그렇게 날아갔다. 나도 결국 프레스카와 핑크 자몽 주스로 돌아서고 말았다. 5개월 간 입은 즐거웠지만, 사람이 물대신 음료를 마시면 살이 찐다는 것은 정말 정말 사실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비싸더라도 꼭 생수를 사먹을게요.
아니면 양동이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