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나이프의 겨울왕국

2월 넷째 주 비버 이야기

by 아델리


옐로나이프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다 되었다. 그동안 건조함에 코피가 자주 났고, 매일 아침 출근길에 래리의 차에 설치된 온도계가 -20도 이하인 걸 확인하며 다시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실감했다. 퇴근길에 래리와 같이 장을 보는 것도 일과가 되었다. 매일 저녁, 래리는 여러 가지 재료로 바비큐를 만들었고 온 집안사람들이 모여 앉아 가족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동안 같이 일하는 동료 두 명의 생일이 지나갔고, 그때마다 여기저기서 파티를 열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끊김 없이 유하게 흘러갔다.


눈만 돌리면 끝없는 눈 밭이 펼쳐졌지만, 그래도 질리지 않았다. 2층 침실에 집 뒤쪽으로 이어지는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문 바로 앞까지 눈이 쌓였다며 2층 방에 사는 친구들이 눈을 치운다길래 구경하러 갔다. 눈이 너무 많이 쌓이면 겨울이 끝날 때까지 문도 못 열 것 같아 치우기로 한 모양이었다. 가끔 잠옷 차림으로도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평소에 잘 관리해 두어야 하는 장소였다.


문을 열자마자 찬 바람이 훅하고 허파를 때렸다. 대충 옷을 껴입은 두 사람이 커다란 삽으로 눈과 얼음을 깨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 가는 걸 지켜봤다. 아주 따뜻한 실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밖도 아닌. 따뜻하면서도 추운 이상한 상태로 포근하게 하얀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눈이 치워지고 난 후, 잠시 문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옆집 농구대도 지붕도, 온 세상이 아직 눈이 덮여 있었다. 여름이나 돼야 다 사라지지 않을까. 여름이 오기는 할까. 슬리퍼 사이로 발가락이 얼얼하게 식어가는 동안에는 여름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여기저기 듬성듬성 선 나무와 전봇대가 거기에 땅이 있음을 표시해 주었다. 더 앞으로 나가면 크레바스처럼 눈에 푹 빠져버릴 것 같아 집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3월이 되자 도시가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3월 초에 집 근처 그레이트 슬레이브 호수 Great Slave Lake 위에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누군가가 성을 지어놓고 축제를 열었다.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어두운 밤을 걸어 꽁꽁 언 호수 위의 성을 찾아갔다. 눈과 얼음으로만 지었다는 그 성 위에는 스노우 킹 Snowking 이라고 앙증맞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누군가 그는 스노우 킹이 아니라 마리화나 킹이라고 농담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에 ① 눈과 얼음으로 호수 위에 성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고, ② 실제로 그걸 실행에 옮겨서, ③ 결국 완성하고야 만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화나와 보드카로 의지를 다지며 지은 눈과 얼음의 성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더 그럴싸해 보였다. (물론 사실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늠름한 눈의 왕이 손수 지은 성 위에서 축제의 개막을 알렸다.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아니, 저렇게 입고 춥지도 않은가! 털모자와 장갑은 기본이고, 한국에서 가져온 두꺼운 패딩을 입고 목도리는 눈 밑까지 끌어올렸다. 두꺼운 바지 안에 내복을 입고 방한복을 신었는데도, 나는 발이 시리고 손이 시리고 목도리에는 입김이 얼어붙어 벌써 입술이 얼얼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도 얼어서 눈꺼풀이 무거운데!


눈의 왕은 이런 추위에 익숙한 듯 계속해서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성의 규모에 비해 불꽃놀이가 좀 빈약하다 싶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안 터진 것도 몇 개 있었던 것 같다. 한겨울에 언 호수 위에서 까만 밤하늘로 터져 나가는 불꽃놀이를 또 언제 보겠어. 바작바작 얼은 입김 때문에 목도리를 여기저기 돌려가며, 아작아작 얼어 속눈썹에 붙은 눈물을 손으로 녹여가며, 불꽃놀이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어흐 추워.



집에 돌아와 추위에 지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어나서 일기에 이렇게 썼다.


어젯밤, 오지게 추운 날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한참 카메라와 씨름을 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나는 사진 찍기를 포기했다. 그만두었다. 손가락이 꽁꽁 얼어 마디마디가 끊어질 것 같아서 일수도 있지만, 그저 내 두 눈으로 즐기고 싶다는 마음에. 이토록 추운, 극지방에 한 없이 가까운, 이 꽁꽁 언 호수 위에서, 눈으로 만든 성 위로 작열하는 불꽃들. 얼어서 제대로 터지지도 못한 무수한 불발탄들을 맨 눈으로 보고 싶어서.


왠지 뭉클해져 눈물이 눈가에서 솟아나자마자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까만 하늘 위로 팡팡-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다 보니, 내 마음도 한없이 가벼워졌다. 이 추운 곳에서 뜨겁게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 현실에 웃음이 났다. 그래서 울다가 또 웃었다. 견디기 힘든 추위에 목도리를 눈가까지 끌어올리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아직도 축제는 계속되고 있다. 매년 3월에 열리는데 예전보다 성도 더 웅장해지고 여러 예술가들이 참가하는 풍성한 축제가 된 것 같다. 꽁꽁 언 호수 위에 선 눈과 얼음으로 지어진 성에서 (아무 상관없지만) 존 스노우의 기분을 만끽해 보는 것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여행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