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둘째 주 비버 이야기
유난히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멋진 날이 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살짝 옆으로 새서 호숫가에 누워 한참 구름을 바라본 적도 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집트 사막에서 하룻밤을 보냈을 때처럼, 하늘이 나를 중심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구름이 여기서 저기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이런 것도 북쪽의 특징일까.
오늘은 가게에서 성대한 생일 파티가 있었고, 여러 나라 음식으로 배를 잔뜩 채우고 산책 겸 구름을 따라 걸었다. 눈이 오면 금세 허리까지 쌓이고, 모자 없이 밖에서 10분만 걸어도 귀에 동상이 걸리는 혹독한 계절을 보내면서 삶이 무척 단순해졌다. 오래도록 걷는 것도 오락이 될 수 있다. 다리가 지칠 때까지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 북쪽의 겨울은 튼튼한 다리가 있다고 해서 아무 데나 걷고 싶을 때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었다.
모든 건 날씨가 허용해 주는 한, 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이토록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웅장할 일인가. 줄곧 하늘을 보면서 걷는 나를 다른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 사람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겠지. 그리고 나선 그 사람도 홀린 듯 구름을 따라 걷기 시작했을 거야. 그런 날이었다. 구름을 보며 걷는 게 전염이 되는, 그런 날. 그런 구름.
시내를 걷다가 구름을 따라 멀리멀리 나갔다. 아직은 얼어있는 호수를 가로질러 걸었다. 군데군데 눈이 얇아진 호수가 불안해서 자꾸 발 밑을 쳐다보았다. 믿기진 않지만, 머지않아 이렇게 호수 위를 걷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때가 되면 호수 주위를 빙 돌아 더 오래 걸을 거야. 햇살이 부서진 물결의 일렁임을 보면서. 그 일렁임이 비친 구름을 보면서.
살면서 걷는 것에 이렇게 해방감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결국은 산책을 위해 긴 겨울이 가길 기다린지도 몰라. 그저 조금 걷고 싶어서.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었고, 우리는 다시 배가 고파졌다. 노랗게 변하는 하늘을 뒤로하고 집을 향해 걸었다. 모자를 쓰지 않아도 동상에 걸리지 않고, 굴러갈 정도로 두껍게 입지 않아도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날씨가 새삼 고마우면서도 아쉬웠다. 한국에서 매년 오는 봄이 오는 것처럼 담담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평생 살면서 이런 추위는 처음이야!’라고 외칠 정도였다. 집에서 밖으로 나가면 콧속에 수분이 한순간에 싹 얼어붙었다. 이상하면서도 약간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또 이런 추위를 느껴보겠나 싶어 바싹 얼은 코로 차가운 공기를 한 번 더 폐 가득 마셔보곤 했다. 이제 그런 겨울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다. 한두 달의 짧은 여름이 가고 나면(같이 일하던 카일리는 옐로나이프의 ‘진짜’ 여름은 고작 한 달 정도라고 했으니) 다시 콧속이 어는 겨울이 찾아오겠지만, 그때 나는 여기에 없을 테니까.
단단하던 호수가 녹아 이 넓은 공간을 물로 채우고, 커다란 구름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날들로 매일이 채워진다.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온다. 당연한 일인데도, 겨울에는 그걸 의심했고, 이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다행히도, 사람의 마음이야 어떻든 구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