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셋째 주 비버 이야기
부서지는 태양 아래 검게 드러난 도로. 길가에 눈이 녹아 만들어진 물 웅덩이가 꽤 깊었다. 일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마다 영원할 것 같던 눈의 후퇴를 목격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어 바다가 아닌가 착각이 들게 했던 그레이트 슬레이브 호수의 가장자리도 녹아서 슬러시처럼 변했다. 밟아보면 아삭아삭 사각사각 팥빙수 파먹는 소리가 난다. 이제 스키두는 더 이상 호수 위를 신나게 달릴 수 없겠지.
언제 이렇게 변했는지! 변화는 너무도 빠르게 엄청난 면적에서 일어나고, 검게 드러난 도로와 초록 초록한 나무를 볼 때마다 어색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눈이 걷힌 그 모습이 오히려 추워 보였다. 어딘가 허전하고 안쓰러웠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 뒤통수를 뜨거운 해가 계속 따라오면서 쿡쿡 찔렀다. 나도 녹아서 없어지는 눈인가 싶어 찔러보는 것 같았다. 녹는 거면 녹아서 얼른 없어져 버려. 안 녹는 거면 나의 강함을 느껴봐. 이제 봄이 온 게 실감이 나니?
봄으로 가는 일반통행로. 이 작은 도시 전체가 봄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돌아가는 길은 없고 오직 직진뿐이다. 아플 정도로 강한 햇살 아래서 눈은 맥을 차리지 못한다. 얼마나 많이 쌓였든 흐물흐물 녹아 없어져 버린다.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하면 그늘에 들어온 게 조금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열심히 걸어서 인지 약간 땀이 스민 외투를 벗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거실 소파 위에 고양이 두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회색의 시드니와 짙은 갈색 무늬가 있는 모카. 창문으로 따사롭게 내리는 볕 아래 누워서 이내 코오- 단잠에 빠졌다. 두 마리 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라 나는 예의 바르게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나의 작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작은 다락방 옷장도 정리할 시간. 한국에서 들고 온 커다란 캐리어에서 가벼운 옷들을 꺼내 놓았다. 아직 영상과 영하를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어, 긴 옷과 따뜻한 재킷은 필수다. 하지만 다이앤이 빌려준 ‘500불 재킷’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 시간이다.
옐로나이프에 사는 사람들이든 일본에서 온 관광객이든, 겨울에 밖에 돌아다니려면 다들 캐나디안 구스 다운재킷을 입었다. 정확한 가격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비싸다고 해서 우리는 ‘500불 재킷’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사 온 재킷으로는 도저히 밖에 나갈 수 없어서 다이앤이 빌려준 이 구스 다운재킷을 입고 나서야 시내도 돌아다니고 스노우 킹의 성에도 갈 수 있었다.
이곳의 추위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냉동창고다. 한국의 추위가 칼바람 때문에 살이 에이는 추위라면, 옐로나이프의 추위는 엄청난 크기의 냉동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추위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면 당장은 춥지 않지만 서서히 손끝부터 아려오며 온몸이 차가워지다, 이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동태처럼 꽁꽁 얼어붙는다.
그런 추위는 다시 없을 거야. 재킷과 함께 추위도 잘 접어 넣었다. 이제부터는 영상의 기온이 이어질 거고, 여름도 올 테니까. 해가 점점 길어지다가 아예 지지 않는 백야도 시작되겠지. 그건 또 어떤 날들일까. 극한의 겨울과 믿기지 않는 봄 다음으로, 어떨지 가늠도 되지 않는 여름이 이어진다. 옐로나이프에서 보낸 몇 달이, 그전에 보낸 수십 년 동안의 겨울과 봄, 여름을 모두 합친 것보다 강렬하다.
내일은 또 어떤 속도로 봄을 향해 달려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