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넷째 주 비버 이야기
옐로나이프에 온 지 세 달. 막 도착했을 때는 언제 이 눈이 다 녹을까, 봄이 오기는 할까, 싶었는데. 이제 눈이 반이고 땅이 반이다. 호수 위에는 아직 눈이 더 많고, 땅 위에는 눈이 더 적다. 매일 걸어 다니던 길이 그 본디 색을 모두 드러낸 지금에 와서야 눈이 다 녹아 없어지는 게 가능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오랜만에 퇴근길에 더 락 The Rock 에 올라갔다. 구름이 낮고 꾸물꾸물한 날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옐로나이프에 왔던 초반이 그리워졌다. 눈에 닿는 모든 곳이 하얀 눈으로 포근하게 덮여 있던 시절. 찬 공기 탓인지 푸르스름한 풍경 탓인지 자꾸만 눈이 시려 속눈썹에 눈물이 고드름처럼 엉겨 붙던 날들.
그때와 지금. 풍경의 색감부터 다르다. 겨울의 옐로나이프는 영원히 크리스마스가 계속될 것 같은 원더랜드였다. 봄의 옐로나이프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고 내 어깨를 쥐고 강하게 흔든다. 네가 알던 풍경은 아주 긴 꿈이었다며, 몽롱한 날 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자, 봐. 보라고. 이게 진짜야. 그동안 눈 속에 묻혀 있던 이 색들이 보이니.
왠지 쓸쓸해졌다. 구름이 점점 무겁게 호수 위로 내려앉는 것 같더니, 곧 무거운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크고 실해서,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이제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린다. 아직 날씨가 쌀쌀하지만 비를 눈으로 바꿔줄 만큼은 아닌 거다.
눈의 제삿날이구나. 비는 눈을 더 많이 더 깨끗하게 씻어 내겠지. 강한 햇살만큼이나 효율적으로 언덕과 길과 호수 위의 눈을 싹싹 치운다. 더 락 위에서 혼자 빙글빙글 돌면서 다운타운을, 올드타운을, 그리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어지러워 더 돌 수 없을 때까지 돌고 또 돌았다.
문득 겨울의 공기가 그리워졌다. 허공에 입을 벌려 숨을 크게 머금고 입을 닫으면 이 사이로 공기가 아작아작 씹힐 것 같은 차갑고 청량한 공기가. 그때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봤지만, 짙은 안개 같은 무거운 공기는 마실 수록 폐가 축축하게 무거워졌다.
세상엔 가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있을 때는 얼마나 좋은지 모르다가, 지나갈 때쯤 되면 자꾸만 아쉬워진다. 그 당시에 충분히 즐겼다고 해도, 때론 지겨울 정도로 길다고 생각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지나간 계절도 그렇다. 이 작은 언덕에 올라 하릴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변한 풍경을 기억 속에 담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 모든 게 다시 그리운 풍경이 될 테니까.
기억 속에서 안개가 자욱이 낀 호수 위로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는 4월 말의 풍경이, 눈이 잔뜩 쌓였던 2월의 초의 풍경 옆에 자리를 잡는다. 옛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매일을 크리스마스로 만들어준 겨울이여,
나는 후회 없이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