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첫째 주 키위 이야기
떠나기 전에 몇 달 동안 고심한 게 이상할 정도로, 매우 평온하게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처음 와보는 도시였지만 어쩐지 익숙하기도 했다. 자꾸 밴쿠버가 겹쳐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시차가 별로 나지도 않는데 (고작 3시간 차이다) 이상하게 시차 적응에 며칠이 걸렸다.
YHA 오클랜드 인터내셔널 호스텔에 일단 체크인을 하고 2층 침대가 4개 들어간 답답한 방으로 굴러 들어갔다. 누우면 천장이 아주 가까이 보이는 침대에 누워 얕은 잠에 들었다가 새벽이면 어김없이 깼다. 한참을 뒤척여도 잠이 다시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주 조용히 일기장을 챙겨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도 아침을 시작할 만큼 날이 밝을 때 때까지 기다렸다가, 워킹홀리데이 생활에 필수인 IRD Inland Reverue Department 번호와 은행 계좌를 개설하러 나갔다. 직접 사무실에 가서 IRD 번호를 신청하고, 은행은 수수료 등을 살펴본 뒤, ABS 은행에 계좌를 개설했다.
뭔가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모든 게 수월하게 풀렸다. 심지어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워홀러들도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금방 적응했다. 왜 혼자 미리 걱정하고 전전긍긍했을까. 걱정을 사서 하는 타입이라 정말 피곤하다. 필요한 걸 모두 신청하고 인터넷에서 찾은 브로커에게 일을 요청했다. 오클랜드는 생각보다 작고 조용해서 도저히 돈이 될만한 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브로커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오클랜드 관광을 시작했다. 워홀러는 계획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머물던 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그러니 어디든 머무르는 동안 최대한 돌아봐야 한다는 압박감을 그지고 있다. 실제로 뉴질랜드에 있는 일 년 동안 오클랜드 땅을 다시 밟지 못했으니, 돈에 쪼들리면서도 여기저기 다닌 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하루는 날씨가 좋아서 버스를 타고 타카푸나 해변에 가서 한참 누워 있다 왔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 별로 없는 게 마음에 들었다. 햇살은 풍부하고 어디에나 공간적 여유가 충분했다. 언제 어디서든 돗자리가 없어도 아무 걱정 없이 누울 수 있는 초록 잔디가 있다는 건 굉장히 힐링이 되는 일이었다. 어디서든 잔디가 보이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누워서 뒹굴었다. 내 집 거실처럼 편안하게.
다음 날엔 호스텔에서 만난 워홀러 셋 중에 둘이 먼저 일을 구해서, 축하할 겸 스카이 타워 Sky Tower 에 갔다. 한국으로 치면 남산 타워인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바닥이 뚫려 있었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던 터라 바닥이 멀어질수록 턱이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귀가 먹먹해질 즈음 전망대에 도착했는데 심지어 이 꼭대기 층도 바닥이 군데군데 유리로 되어 있어서 내내 긴장하며 걸어 다녔다. 다리가 후들거리긴 했지만, 야경이 예뻐서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오랜 시간 전망대에 머물렀다.
그다음 날엔 하나 남은 워홀러와 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공원을 지나가는 길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잔디밭에 누워 뒹굴뒹굴 게으름을 피웠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폭신한 잔디만 있으면 어디에든 눕는 좋은 습관이 생긴 것 같아 내심 기뻤다. 4월의 가을 햇살이 아직 어색하긴 했지만, 낮잠에 빠질 만큼 충분히 포근했다.
하나 남았던 워홀러도 일을 찾아 떠났다. 이제 나 혼자네. 오클랜드에 일주일 더 머무르기에는 돈이 빠듯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드디어 브로커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클랜드에서 버스로 2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카티카티 Katikati 라는 마을로 오면, 그 근처에 있는 키위 팩 하우스에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드디어 일을 구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뉴질랜드 워홀 생활 시작이다.
밀린 빨래를 하고 다시 짐을 꾸렸다. 주말에 도착해서 YHA 오클랜드 인터내셔널 호스텔 6인실에서 이틀을 묵고 같은 방으로 연장하려고 했는데 예약이 차서 더 갑갑한 8인실로 옮겨 4일을 묵었다. 그러고도 브로커는 감감무소식이라 더 연장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방이 아예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실 거기서 더 머물면 없던 폐소공포증도 생길 것 같았다) 서프 앤 스노우 백패커스로 옮겨서 이틀을 더 묵었는데, 층고가 높은 곳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뷰는 보잘것없었지만 창이 시원하게 나 있어서 답답하지 않아 좋았다.
카티카티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2시간 후 버스에서 내리면 연락한 브로커가 기다리고 있을 거고, 나를 다시 새로운 숙소로 넣어주겠지. 하나의 이층 침대를 벗어나 또 다른 이층 침대로 들어간다. 그렇게 계속 침대를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층 침대를 벗어날 날도 오겠지.
카티카티라는 귀여운 이름의 마을도 궁금하고, 앞으로 하게 될 일도 궁금해졌다. 키위 팩 하우스라니 어떤 곳일까.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몸으로 하는 일을 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창밖으로 평화로운 풍경이 슈슈슉 지나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도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