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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Nov 09. 2020

오늘의 백수

모기가 출몰하는 11월의 어느 날


아침부터 배가 고파서(아마도 어제저녁을 너무 일찍 먹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 일단 쌀을 씻어 밥부터 올렸다. 지난주에 너무 익어서 쿰쿰한 냄새가 올라오는 묵은지가 아까워 머리를 감기듯 씻어서 쫑쫑 썰어놓은 게 생각이 났다. 지난 주말에 순천과 여수를 다녀왔는데, 그 후로 속이 영 좋지 않고 설사를 반복해서 병원에 갔더니 장염이라고 했다. 3일 치 약을 받아와서 먹었지만 아직도 속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아서 일부러 맵지 않게, 씻은 김치에 고춧가루 대신 간장을 소심하게 끼얹어서 볶고 쿰쿰한 맛을 잡기 위해 설탕도 솔솔 뿌렸다. 참치 한 캔을 두드려 넣고 갓 한 촉촉한 쌀밥을 두 공기 넣었다. 맛을 봤더니 앗, 너무 짜다. 결국 한 밥을 모두 때려 넣었다. 짜잔. 김치볶음밥 3인분이 나왔다. 내일도, 모레도. 아침은 김볶밥이다.


2인분은 1인분씩 유리로 된 밀폐용기에 담아 놓고 나머지 1인분을 프라이팬 째 들고 거실로 갔다. 영양을 위해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할까 망설였지만 귀찮음에 굴복하기로 했다. 밥을 올려놓고 설거지를 하면서 보던 <그것이 알고 싶다>를 이어서 틀어놓고 밥을 먹었다. 대체 저 사건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저렇게 살인을 저지르고도 공소시효가 끝나면 그냥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건가. 그래도 괜찮은 걸까. 김치볶음밥은 매콤함이 없었지만 내가 하는 모든 요리가 그렇듯 맛이 꽤 괜찮았고(내 입맛이니까) 프로그램이 끝남과 동시에 식사도 끝났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뭔가 달달구리한 게 먹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새로운 욕망은 전혀 아니었으므로, 집에는 달달구리한 게 별로 없었다(욕망 원천봉쇄). 냉장고에 며칠 전에 냉침해놓은 차가 있었기에 터키에서 사 온 찻잔을 헹궈서 두 잔을 마셨다. 달달한 시나몬 맛이 올라오는 차라서 식후에 마시기 딱 좋다.


사민 노스랏의 <소금 지방 산 열>을 찾아서 읽었던 지점에 꼽힌 북 다트를 뽑아놓고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열” 부분이다. 눈만 바빠서 귀가 심심할 것 같아 턴테이블 위에 모차르트 피아노 연주곡을 올렸다. 턴테이블은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동거인이 갖고 싶다고 해서 어머님이 선물해 주셨다. 이어서 어떤 택시기사님이 어머님께 파셨다는 클래식 LP 전집도 보내주셨는데 클래식이랑 별로 친하지 않아서 자리만 차지했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면서 모차르트의 변주곡을 죽도록 반복해서 쳤던 게 생각이 났다. 남이 연주하는 모차르트는 참 아름답고 평온하구나. 전혀 마음이 급하지도 않고.






오후에는 정말 오랜만에 다시 문을 연 구민 스포츠 센터에 가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에 올해 초부터 문을 닫았는데 1단계를 틈타서 11월 한 달 동안 임시 개장을 한다고 공지가 떴다. 그나마도 강습은 안 하고 자유수영만 한 타임에 30명씩 선착순이랬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몸 풀러 많이 오실 것 같아서 느지막이 오후 2시 타임에 갔다. 선착순이라는 말에 불안해서 40분이나 일찍. 집을 나서기 전에 침대 아래 수납공간에 오랫동안 박혀 있던 수영복과 수모, 수경까지 찾았는데 실리콘 브라캡이 보이지 않았다. 몇 달 전에 수영장이 있는 호텔에 묵었다가 씻고 나서 샤워실에 두고 온 게 생각났다. 미리 주문했었어야 되는데 까먹었네. 그냥 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38초 정도 후, 나는 이걸 고민하는 자체가 좀 싫어졌다. 수영복을 안 입은 것도 아니고, 내 가슴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추가로 캡까지 사서 가려야 하는가. 게다가 수영에는 하등 도움도 안 되는 장착이다. 하여 용기 있게 맨가슴으로 수영하기로 했다(부끄러움은 타인의 몫). 수영장으로 가는 길에 온통 은행나무 천지라 짙은 가을의 색을 감상하는 시간도 가졌다. 일찍 온 게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없어서 당당하게 1번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섰다. 4,000원을 내고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몸을 풀고 2시에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총 다섯 개의 레인이 있는데 각 레인 별로 한 2-3명 정도씩 들어가 있었다. 세어보니 16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40분이나 일찍 온 건 좀 오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너무 일찍 오지 말아야지.


뒷사람에게 쫓기지 않고, 앞사람을 쫓아가지 않아도 되는 수영은 좋다. 참 좋다. 왜 맨날 죽도록 빠르게 랩을 돌아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냥 리조트에 온 것 마냥 천천히 즐기면서 수영하고 싶은데, 늘 뒷사람에 쫓기고 앞사람을 죽도록 쫓아가면서 했다. 오늘만큼은 다들 여유롭게 랩을 돌고 있었다. 중간중간 아주 여유롭게 숨을 돌리면서. 갈 때는 배영으로 갔다가 자유형이나 평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돌았는지 세지 않아 모르겠지만 금세 첫 번째 50분이 지나갔다. 10분 동안 샤워실로 가서 좀 더 스트레칭을 하다가 3시에 다시 입수! 이번에는 각 레인 별로 1명씩 들어가 있었다. 이 넓은 수영장에 각 레인 별로 딱 한 명씩. 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레인의 한가운데에서 팔을 옆으로 넓게 저으며 배영으로 갔다가 다리를 아주 쫙쫙 벌리며 평영으로 돌아왔다. 이 넓은 레인을 혼자 쓰게 되니 자유형을 하는 게 공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배영부터 시작해서 인지, 배영을 좋아한다. 숨도 안차고 편하니까. 수영을 본격적으로 배운 후부터는 좋아하는 게 하나 더 늘었다. 바로 평영이다. 평영을 하면 물속이 잘 보여서 좋다. 수영장 바닥에 물이 일렁일렁 거리며 빛나는 걸 보면 힐링이 된다. 웨이브가 잘 안 되는 척추라 접영은 아직 어렵고 자유형은 맨날 정신없이 앞으로만 가게 돼서 별로다. 그래서 50분 동안 배영과 평영을 반복했다. 쉬고 싶으면 아무 때나 멈춰서 쉬었다. 옆 레인 사람들을 보니 레인을 혼자 쓰는데도 갈 때는 오른쪽으로 갔다가 올 때는 왼쪽으로 왔다(대체 왜인가요...). 나는 딱히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내 멋대로 한다. 첫날이라 50분 정도 하고 말겠지 했는데 50분 + 50분을 꽉 채워서 하고 마지막으로 나왔다. 장하다.


평일 낮에 수영도 가고. 백수 좋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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