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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Mar 24. 2021

커피우유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30


커피우유

Barkly Homestead, Northern Territory

Australia



"오늘 물건이 들어왔다고 들었어.”

먼지투성이 머리를 올려 묶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온 제스가 말했다. 푸른색 티셔츠는 땀에 젖어 더욱 짙은 색으로 변했고, 반바지 아래로 그을린 다리가 건강해 보인다. 오늘 하루 종일 밖에서 일했을 그녀의 목마름이 느껴졌다.


"응, 몇 개밖엔 안 들어왔지만 말이야.”

아웃백에서는 모든 게 귀하다. 필요한 건 다 있지만 많지는 않다. 귀한 것들 중에는 커피 우유도 있다. 흰색 바탕에 먹음직스러운 갈색 점박이를 달고, 무식하게 크지도 절대 모자라지도 않는 600ml 사이즈의 고고한 자태로. 음료 냉장고에 콜라, 스프라이트, 레드불, 비타민 워터와 같이 일렬로 쭉 들어서 있지만, 커피우유의 줄은 그 인기를 대변하듯 매우 짧다.


"오늘 하나 먹어야 할 것 같아. 아니면 또 한참 기다려야 하잖아.”

큰 마을에서 4시간 정도 떨어진 이 곳, 바클리 홈스테드에는 15일에 한 번씩 물품이 들어오는데, 커피우유는 이 곳을 찾는 손님에게도, 스태프에게도 인기가 많아 2주를 끝까지 버틴 적이 없다.


"오늘 근무가 끝날 때까진 있을 거야. 아마도."

카운터에 선 리자가 말했다. 약간은 자신 없는 말투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에어컨을 돌리지만 가게 안은 전혀 시원하지 않다. 여긴 하루 종일 뜨거운 볕이 벌을 내리듯 내려쬐는 아웃백이니까.



브리즈번에서 영혼을 탈탈 털리고 3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도착한 바클리 홈스테드는 지금까지 지내 본 그 어느 곳과도 달랐다. 아웃백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그대로 황량하고 휑하고 고립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뜨겁고 끈끈하고 아름다운 뭔가가 있다.


동쪽으로는 마운트 아이자라는 소도시까지 450km, 서쪽으로는 테넌트 크릭이라는 마을까지 211km 떨어져 있고, 가게 앞에 바클리 하이웨이 66번 고속도로만 쭉 뻗어 있는 곳.


그곳에 생긴 것도, 성격도 다른 형제 톰과 앤드류가 바클리 홈스테드 로드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치는 여행객들과 트럭 운전수들을 위한 주유소와 편의점 겸 바 겸 식당이 어우러진 로드하우스, 그리고 하룻밤 쉬어갈 수 있는 모텔과 캠핑장까지 꼼꼼하게 갖춘 그야말로 아웃백의 오아시스다.



바클리 홈스테드를 통과하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자정 무렵에 도착한다. 내가 도착했던 그날도 어김이 없었다. 별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한 밤에 나를 이곳에 초대해준 언니와 사장 톰, 그리고 몇몇 직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숙소 건물에 작은 방 하나를 배정해주고는 다들 아침에 보자며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작은 시리얼 한 박스와 과일 하나를 받아 아침을 먹고, 온 군데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러 다녔다. 사장인 톰과 앤드류, 그들의 엄마인 페니와 그녀의 남자 친구 스티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관리하러 다니는 토니 아저씨. 그리고 아일랜드, 캐나다, 영국, 미국, 네덜란드, 그리고 한국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이 곳에 흘러들어온 친구들.


어둠 속 작은 방에서 시작된 이곳에서의 생활이 벌써 5개월이 다 되어 간다. 처음에는 로드하우스와 모텔을 오가며 닥치는 대로 일하다가, 한 달쯤 후에 주방에서 모닝 쿡으로 일하던 캐시가 떠난 주방에서 붙박이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벽 5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이 곳에서의 생활은 여유로움 그 자체다.

로드하우스에서 일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른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오후 2시가 되면 가장 먼저 일을 마치고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동안 모텔 앞에 있는 작은 수영장에서 수영 연습을 하다가, 요즘에는 "수영 금지"라고 쓰인 댐에서도 혼자 용감하게 수영을 한다.


미국에서 온 워홀러 제스가 빌려준 해먹을 나무 사이에 걸어놓고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고, 해먹 앞으로 어슬렁 거리는 강아지(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한) 준과 놀기도 한다. 저녁에 노을이 질 때쯤엔 다른 친구들과 댐 뒤에 길게 뻗은 톰의 경비행기 활로로 산책도 간다. 그러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뱀과 마주쳐 심장이 내려앉기도 하고.



아웃백이라는 고립된 장소에 온갖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복작대는데도, 꽤 평화롭다. 다른 친구들이 일을 마치는 오후 시간이 되면 같이 수영을 하거나, 숙소 앞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천천히 지는 노을을 바라본다. 누가 소포로 김을 받으면 내가 주방에서 몰래 밥을 해다가 초밥을 말아먹고, 캠핑장에 있는 망고나무에 망고가 열리면 다 같이 돌려먹는 식이다.


그런 친구들에게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커피우유다. 누가 폴의 커피우유가 호주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우유라고 했는데, 나도 그 말에 10000% 동감한다.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동시에 묵직한 커피맛이 느껴지는 커피우유! 500ml는 아쉬울까 봐 100ml 더 넣은 그 여유로움이 좋다. 낮에 누구보다도 먼저 일을 마치고 슬쩍 냉장고로 가서 커피우유를 할인된 가격에 샀다.


숙소 앞에 앉아 커피 우유를 홀짝홀짝 마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마시는 커피우유가 얼마나 달콤한지. 뜨거운 아웃백에서 시원 달달한 커피우유를 먹어본 사람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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