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5회
안전에 대한 욕구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 때문일까. 부모님이 잘못 키워서일까. 예민한 성향 때문일까. 대체 뭐가 문제일까. 왜 나는 계속해서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불안해할까. 어떻게 해야 안전하다고 느낄까. 언제쯤 이 안전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을까. 나이를 얼마나 더 먹어야 애써 위로 올라갔다 다시 아래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는 이 지겨운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매슬로의 욕구단계이론(Maslow's hierarchy of needs)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가 위계를 갖는다는 심리학적 관점이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이론은 무엇보다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 이유인 동기 부여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메슬로는 욕구의 위계를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소속 욕구", "존중 욕구", "자아실현 욕구"로 구분하였으며, 훗날 여기에 더해 "자기 초월 욕구"를 추가하였다.
안전 욕구 (Safety)
개인의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으로 안전의 욕구가 우선하여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안전의 욕구는 주거지, 직업 안정성, 건강, 안전한 환경을 포함한다. 한 사람이 환경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면, 생존을 위한 더 높은 욕구를 추구하기 전에 안전을 먼저 확보하려 한다.
따라서 “안전 욕구에 대한 지속적인 만족이 바로 삶의 안정성"인 것이며, 안정성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항상성 개념을 다시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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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일과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했다. 평소 생활에서 불평불만이 많은 편은 아닌데, 유독 일에 대해서 계속 마음이 불편한 일들이 생긴다. 나는 자기 효능감이 중요한 사람인데 지금 그게 전혀 없다. 회사를 다닐 때는 일이 힘들지언정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전직을 하고 나서 프리랜서가 돼 보니 상황이 다르다. 이 분야가 나랑 맞지 않는 거라면 더 시간낭비 하지 말고 접어야 되지 않을까. 하루라도 빨리 나랑 맞는 일을 찾고 싶은데, 이게 또 완전히 아니라는 확신이 없다. 나는 매몰비용 때문에 손을 떼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이 안에 내가 원하는 뭔가가 있긴 한 걸까.
일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먹고살기 위함이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일을 통해서 나 스스로를 부양하는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일을 해온 이유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문제는 내가 이제 더 이상 일을 그런 식으로만 대하고 싶지 않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나의 어떤 소명에 대한 열망이 이제 더 이상 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에서 경제적 여유와 자아실현(이라고 하면 좀 거창해 보이지만), 그런 비슷한 내면의 만족감을 같이 얻으려고 하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갖은 애를 쓰며 인생을 낭비하는 중일까?
지금 하는 일로 돌아오면, 나는 이 일을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먹고살기 위해서 한다. 그래서 잘하고 싶다. 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 얼른 돼버리고 싶다는 조급함이 있다.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맡은 바 소임은 잘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안전한 땅을 밟고 설 수 있을 테니까.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드디어 딛고 설 수 있는 작은 땅뙤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거기서 잠시 쉬면서 다음을 계획할 수 있다. 망망대해를 헤맨 지 너무나도 오래되어, 땅을 밟는 그 느낌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내가 그 작은 땅 한 조각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일을 좋아하지도 않고 나한테 잘 맞을 것 같지도 않은데 시작했네요. 선생님이 정곡을 찔렀다. 맞다. 회사를 그만 둘 당시에 잔뜩 높아진 스트레스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데,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친구의 추천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당시에 이 일이 잘 맞을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 결과 지금도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일이 좋아지지도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잘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뭐랄까. 아무리 스스로 채찍질을 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나아가지 질 않고, 조금이라도 쓰러질 기회가 생기면 자꾸만 픽픽 쓰러져 버린다. 어떤 일을 하든 시작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가 될 때까지 쉼 없이 달려야 하는데, 나는 이미 그런 힘을 다 소진해 버린 상태로 시작한 것 같다.
친구와 같이 새로운 메서드를 배우기로 하고 무려 4년짜리 코스에 뛰어들면서, 에너지 고갈은 극심해졌다. 일에 적응할 시간을 가지면서 좀 쉬고 에너지를 채웠어야 했는데,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부거리까지 떠안았다. 이 분야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뭐라도 배우면 낫겠지, 하는 안전에 대한 조급한 갈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을 하고 나서 나는 일과 공부, 두 가지 모두에서 고통을 받았다. 두 가지 모두에서 나는 이방인이었고,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안전지대를 찾지 못한 두 발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옆에서 친구는 탄탄하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다. 이 친구는 이미 10년 동안 이 일을 해왔고, 이 일을 잘하고 좋아한다. 똑같은 걸 배워도 이 친구는 그걸 실제로 사용하고 응용하고 자신의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다. 나는 그냥 계속 물을 먹으며 가라앉았다 떠오르길 반복하고 있다. 허우적거리는 내 옆으로, 친구는 커다란 크루즈 배를 타고 유유히 이 바다를 지나간다. 단순히 이 친구가 가진 경력이 부럽거나, 이 친구처럼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 사이에는 채울 수 없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저 그 안전함이 부럽다. 이 일을 잘 알고, 또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그 안전함이 갖고 싶다. 이 안전에 대한 욕구가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서, 뭘 해도 불안하고 긴장의 끈이 놓아지지 않는다. 쉬는 시간에도 그 불안과 긴장은 내 신경을 갉아먹는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불평등을 고려할 때 질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모두를 질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 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평등, 기대, 선망
『불안』 중에서
어쨌거나 이제 곧 4년의 공부 과정은 끝이 난다. 기왕 이걸 공부했으니까 이게 좋아졌으면, 그래서 나도 드디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공부 과정을 마치는 것은 나의 능력에 달려 있으니 시키는 대로 노력을 하면 되지만, 이걸 좋아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컨트롤할 수 없는 거라서 괴롭다. 내가 이 공부를 정말 좋아서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지금까지 들인 돈과 시간, 에너지가 아까워서 못 놓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메서드를 좋아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말에 ”좋아한다“라고 말하기에는 그 감정이 너무 미약한 것 같다고 답했다. 내 기준에 ”좋아한다“는 것은 거기에 푹 빠져서 놀듯이, 재미있어서 기꺼이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기준에 이 공부는 부합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푹 빠져서 놀듯이 재미있어서 했던 게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하고 싶었던 건 없었다고. 나는 그런 부분이 좀 망가진 것 같다고 했다. 어떤 것이든 — 그게 일이든 공부든 취미든 — 다 그런 식으로, 일처럼 한다. 살려면 해야 하니까 노오력을 해서. 어떻게든 한다. 해낸다.
무엇이 망가졌는지 알게 되었네요. 선생님이 옅게 웃었다. 뭐가 망가진 걸까요. 즐거움의 수용체? 내가 물었다. 선생님은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 몰입하는 순간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생각과 질문과 고민과 걱정에 싸여 있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인식의 상태에 있다. 그러면 뭔가에 빠질 수가 없고, 몰입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아직 안전하지 않은 거예요. 안전하지 않으니까 어떤 일에 깊게 빠지기가 어려운 거죠. 안전하지 않은데 어떻게 재미를 찾겠어요. 뭐가 재미있는지 알려면 이런 거 저런 거 많이 해보고 재미를 느끼는 것에 깊게 몰입을 해봐야 하는데, 그런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는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살아왔고, 그래서 “좋아한다“는 걸 그 자체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대신에 남들이 하는 걸 보면서 이상적인 기준만 만들어 버린 셈이다. 선생님이 예를 들며 말했다. 한 번도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을 재료랑 성분을 따지고 리뷰를 본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맛인지 알 수는 없어요. 결국은 내가 먹어봐야 하고, 한 번 먹어봐서 모르겠으면 어러 번 먹어보고 음미할 시간을 가져야 해요.
걱정 없이 음미할 시간.
나를 잃어버릴 정도로 무언가에 몰입하는 시간.
나는 그걸 잃어버린 채 살아왔구나. 그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