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를 낳기 전, 밤송이가 바구니에 한가득 담겨있는 꿈을 꿨다고 했다. 태몽이라면 으레 용이나 호랑이, 보석 같은 것들을 떠올렸기에 나 역시 그럴듯한 무언가일 줄 알았다. 그런데 밤이라니. 탄생의 신호가 가시 박힌 한 줌의 덩어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밤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괜스레 엄마에게 투덜거렸던 어린 날의 치기는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불현듯 밤 생각이 난 것은 자취를 처음 시작한 해의 추석이었다.
아빠 쪽이 유서 깊은 집안이라 명절마다 제사를 지냈다.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다듬는 일은 늘 엄마의 몫이었고, 우리 가족은 다른 친척들보다 하루 일찍 내려갔다. 길쭉하고 곧게 뻗은 엄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은 제사상 위에 차곡차곡 올라갔다. 엄마가 만든 음식 앞에서, 큰 남자 어른부터 어린 여자 조카들까지 차례로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 엄숙하다 못해 고까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같이 거대한 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우리가 따뜻하고 노릇노릇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동안, 여자 어른들은 다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했다. 조상을 위한 공은 늘 여성이 들이는데, 그 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대답을 가늠하는 대신 거실 옆으로 난 작은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현실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일찍이 터득한 방법이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엄마가 건네준 겉옷을 챙겨 입으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성묘에 다녀오고 나면 자연스럽게 한 무더기의 가족들이 떠났고, 우리 가족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걷는 산길은 언제나 처음처럼 낯설었으나 얼굴도 모르는 어르신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 웅크려 앉는 일은 금방 익숙해졌다. 챙겨온 음식을 차리고, 소주잔에 술을 따르고, 하나둘셋 하는 구호에 맞춰 일제히 절을 올리며 마른풀 위에 두 손을 포개어 놓고 무릎을 접었다 펴는 일을 반복했다. “앗 따가워!” 누군가의 가벼운 비명이 들리기 전까지는.
주인공은 사촌 동생이었다. 너무 열심히 절을 하느라 무릎에 밤 가시가 박힌 모양이었다. 작은엄마가 달려와 동생의 무릎을 살폈고, 많이 아프냐고 물으니 말없이 울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 밤송이가 널려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밤이나 줍자고 작은아빠가 말을 꺼내자, 옆에 있던 당숙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포대를 가져왔다. 공짜 밤 채집은 지루한 연휴에 지친 모두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고, 어느새 다들 말도 없이 바닥만 더듬고 있었다. 나 역시 두 발로 밤송이를 쪼갠 뒤 긴 나뭇가지로 밤송이를 벌려 통통한 알맹이를 꺼냈다. 더 넣을 곳이 없을 때까지 부지런히 주워 담았다.
그렇게 주워 온 밤들을 공평하게 각 가족의 주머니로 돌아왔다. 며칠은 든든히 먹고도 남았다. 과도로 껍데기를 깎아 생으로도 우적우적 씹어 먹고, 냄비에 쪄서 뭉근하게 먹기도 했다. 특히 송곳니로 밤을 대충 쪼갠 다음, 작은 티스푼으로 밤의 속살을 조금씩 떠서 먹으면 입안에 은근히 퍼지는 고소한 맛을 좋아했다. 가끔 그 안이 보금자리였던 애벌레라도 나오면 으악 하고 깔깔댔던 순간들이 즐거웠었다. 그래, 그즈음에는 밤을 참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날 이후 밤을 줍는 일은 추석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해가 갈수록 특별함은 진부해졌고, 그러니 얕은 즐거움이 거품처럼 사라진 것은 당연했다. 길이 없는 산길을 헤매는 일도, 처음 보는 나무와 풀들을 발견하는 일도 점점 시들해졌다. 한때는 앞다투어 입에 넣던 달큰한 간식이 식탁에 올라와도 모르는 척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럴 만도 했던 양의 밤이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혼자 보내는 명절이면 그 산등성이가 떠오른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밤을 주워 담던 사람들의 그림자와 발로 밟아야 겨우 벌어지던 밤송이의 틈. 그 안에서 힘들게 꺼내던 작고 단단한 알맹이. 장갑도 없이 손끝에 남던 까슬한 감각과 입안에 번지던 은은한 단맛까지도. 그러다 어째서 나는 밤송이로 태어났을까, 문득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반짝이며 귀하게 여겨지는 것도 아니고, 몇 번쯤 찔리고 나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말이야. 그 점이 어쩐지 나와 퍽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왜 하필 밤이었는지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이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부풀던 마음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일은 당연한 나이가 되었다. 어쩌면 밤송이처럼 살아가는 일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