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 갈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 꿀벌 Oct 03. 2020

시작에도 때가 있다.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입니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보다 끝내는 게 어려운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시작은 모든 일에 있어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에게 있어 여행의 시작은 티켓을 끊는 것이었다. 일단 티켓만 끊으면 비행기 삯이 아까워서라도 대부분의 여행은 실행에 옮겨졌다. 시작이 다는 아니지만, 시작이 없으면 끝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여행 가고 싶어.”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엠마(Emma)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딱 한 번,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고 가지 못한 여행이 있다. 바로 지난 3월, 코로나가 퍼지며 취소된 유럽 여행이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던 우리는 6월 하순에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편을 예약했다. 그러고는 코로나가 종식되는 대로 숙소를 예약할 요량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코로나는 살아남았고, 우리는 모든 비행기 편을 취소해야 했다. 

 그 후로 날씨가 좋은 날이면 엠마는 여행 앓이라도 하듯 여행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푸념하듯 늘어놓았다.


 “원래 지금쯤이면 영국에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가까운 데라도 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정에 없는 여행은 나쁘지 않지만, 여름에 피크닉은 아무래도 끌리지 않는다. 더운 날씨는 질색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어디를 가든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한다. 습한 날에 마스크라니! 생각만으로 마스크에 닿는 피부에 습기가 차오르는 기분이다.


 애초에 여름에 유럽 여행을 계획했던 것도 유럽의 기후가 좋기 때문이었다. 해외여행을 다니며 깨달은 것은, 장소와 날짜를 정할 때는 반드시 기후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 여름, 쓰기 편한 휴가에 맞춰 싱가포르를 방문한 한 후, 날씨 확인은 여행지 선정에 필수 요소가 되었다. 도시째로 통구이가 되는 기분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세아니아와 한국 사이에 있는 나라를 주로 여행했었다. 휴가를 맞추어 여행지에서 만나 돌아다니는 식이었다. 그러다 올해 이직을 결정하며, 좀처럼 가기 힘든 유럽을 돌아보기로 했다. 전부터 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오세아니아에서 유럽을 가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편도로 이틀가량을 비행기에서 보낼 각오를 해야 했고, 거리가 먼 탓인지 요금도 만만치가 않았다. 몇 주 휴가를 내는 정도로는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며 뜸을 들이던 중, 이직을 앞두고 두세 달 가량을 몽땅 비워 천천히 돌고 올 생각으로 티켓을 끊었다. 오세아니아에서 일본으로, 한국으로, 영국으로, 프랑스로, 독일로… 중간중간 일주일씩 묶어가며 긴 여행길에 지치지 않도록 계획했다. 비행기표를 끊으며 곧 다가올 여행에 가슴이 뛰었다. 곧 회사를 그만둔다는 생각에 마음은 그 여느 때 보다 가벼웠다. 


 그렇게 4월이 되었고, 오세아니아는 코로나로 물들었다.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나는 더는 여행을 걱정할 때가 아니게 되었다. 호주 정부가 코로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국경을 봉쇄할 거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윽고 호주로 통하는 비행편이 하나둘 취소되더니, 몇몇 국가는 ‘외국인 경우 금지'까지 내걸었다. 국경을 봉쇄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리고 불과 나흘 만에 일이었다. 이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비행편은 구하는 족족 취소되었고, 비행기 요금은 평소에 4배까지 뛰었다. 그마저도 뜨는 비행기가 없어 나왔다 하면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매진되기 일수였다. 결국 나는 한국의 한 항공사에서 띄어준 전세기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시작에는 때가 없다고 하지만 이번 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모든 비행기 편을 취소하는 것은 물론, 한국에 귀국한 후에는 꼼짝없이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반년 정도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코로나는 계속해서 전 세계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이제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안고 있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는 말은 때때로 많은 사람을 억누르거나 부추기는 말로 쓰인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꾹 참고 공부에, 일에 매진한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 ‘오늘을 위해 산다.’는 말이 대책 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잘 보면 퍽 현실적인 이야기다. 사람들이 하고 싶다고 느끼는 무언가는 실현 가능한 것일 때가 많다. 여행을 간다거나, 친구들을 만난다거나, 회사를 쉰다거나 하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 말이다. 그렇기에,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바로 지금이 시작할 때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그 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스로 옭아매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