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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Oct 07. 2020

무계획의 철학


 사전적 의미의 계획은 앞으로 할 일을 미리 생각하여 정하는 것을 말한다. 실현 가능한 우선순위의 배열인 셈이다. 꼼꼼한 계획은 기억의 부재를 방지하고 실수를 줄이며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나 또한 고등학교 때부터 꽤 오랫동안 다이어리를 적었다.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을 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을 때, 계획은 더할 나위 없는 조력자다. 하지만 여행에 있어서만큼은 최소한의 계획만을 허용한다. 해외여행이라면, 비행기표와 숙소. 국내 여행이라면 목적지의 선정까지다.

 계획 없는 여행을 선호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여행은 내게 ‘휴식'이다. 휴가를 내어 잠깐 일상에서 벗어나 갖는 꿀 같은 시간. 이런 시간을 쉴 새 없는 관광으로 채운다면 나는 심신이 지쳐 앓아누울 것이고, 비록 많은 사진을 남길지언정, 휴식으로서의 여행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유도에 따른 의외성에 있다. 아는 이 없는 타지에서 주어진 방대한 시간은 의외의 만남과 성과를 듬뿍 안겨준다. 물론 전혀 수확이 없을 때도 있지만, 그조차도 ‘호캉스'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여행의 매력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대게 무계획은 더욱 윤택한 시간으로 꾸며지게 된다. 뉴질랜드의 테카포호수(Lake Tekapo)에 머물렀을 때, 나는 이튿날 오후까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워낙 급하게 잡은 일정이기도 했고, 관광 정보를 알아볼 때에도 ‘밤에 쏟아지는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것 외에는 관심이 가는 정보가 없었다. 

 오전에 일찌감치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마친 나는 배고픈 배를 채우려 호텔 로비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치킨 샐러드를 먹으며 삼각대에 사진기를 설치하고 혼자 기념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친구들에게 전송한다. 혼자 여행하는 내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다. 배를 채우고 나니 겨우 정오가 막 지나, 창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뭐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호텔 로비로 가서 묻는다. 


 “저는 밤까지 아무 일정이 없어요. 여기서 무얼 하면 좋을까요?”


 “사실 이곳은 밤에 별을 관측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관광코스는 없어요. 그 외에는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걸어서 1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작은 교회가 있어요. 호수가 바로 보이는 교회는 이곳의 촬영명소죠. 혹시 커피를 좋아하나요? (좋아한다고 대답했다)그럼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는데, 그 산꼭대기에 아스트로(Cafe Astro)라는 카페가 있어요. 저도 몇 번 가봤는데, 저는 잘 모르지만, 커피로 유명한 것 같더라고요. 5시까지 하니까 등산 겸 천천히 걸어갔다 오시면 시간도 딱 맞을 거에요.”


 자, 이제 나는 더할 나위 없는 여행코스가 생겼다. 산꼭대기에 있는 카페라니! 평소 같으면 절대 가지 않겠지만 시간 많고 할 일없는 나는 간단히 채비한 뒤 걸음을 옮겼다. 비록 산을 오르는 동안 한 시간 정도 산을 오르면 나온다고 아주 쉽게 말했던 직원이 조금 원망스러워졌지만, 정상에 오르자 그 노고는 금새 잊혔다. 고도가 꽤 높은 카페는 기온이 꽤 쌀쌀했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날따라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어느새 흩어져 새하얀 하늘을 덮었고, 나는 구름 위에서 커피를 마셨다.


 엉금엉금 산에서 내려와 호텔 침대에 뻗었다. 오랜만에 등산에 긴장한 근육이 풀어지며 노곤해졌다. 잠시 눈을 감고 침대로 파고드는 피로의 중력에 집중했다. 침대 속으로 푹 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포근했다. 아주 잠깐, 단잠을 잤다. 그러다 퍼뜩, 잠에서 깨어 호텔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주변에 쌀밥을 파는 레스토랑이 없는지 물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여행하는 내내 양식만 먹은 탓에 담백한 쌀밥이 그리웠다. 다행히 호텔 가까운 곳에 유명한 일식집이 있었다. 호수밖에 없는 이런 시골에 이토록 많은 일본인이 일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 식당은 꽤 크고, 직원은 대부분 일본인 같았다. 호수가 바로 보이는 식당은 꽤 오래전에 자리를 잡은 유명한 맛집인 듯했다. 그곳에서 연어알이 가득 들어간 연어회 덮밥을 먹었다. 멜버른에서는 좀처럼 평범한 메뉴에 들어있지 않았기에, 듬뿍 들어 있는 연어알에 조금 감동해 버렸다. 사진을 찍어 호주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고는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밤에는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친해진 호텔 직원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래 필리핀에서 유학했던 그는 그곳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이민을 목적으로 캐나다에 살았지만, 결혼에 확신을 갖지 못해 결국 도쿄로 돌아갔다. 어찌 된 운명인지 취직한 회사는 몇 년 후 어떤 사건으로 폐업을 맞이했고, 고민 끝에 돈을 벌어 대학원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 돈을 벌기 위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왔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뉴질랜드를 여행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차에 이 호텔에서 일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그 후 약 1년 동안 호텔에서 취업비자를 받아 일하고 있었다. 인생은 새옹지마.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 우리는 그 날 새벽, 함께 산책하며 쏟아지는 별을 구경했다. 별은 사진에서 본 것 만큼 깨끗한 은하수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사실, 관광 사진으로 쓰이는 그런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건 손에 꼽을 정도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럼에도 성실한 무계획을 실천한 하루의 잠은 달콤했고, 오전 늦게 일어나 거니는 호수는 활짝 갠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친구가 된 그와 함께 점심을 먹고 기념품 가게 들러 지인들의 선물을 산 뒤, 배웅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계획 없는 여행에서, 우리는 때때로 근사한 우연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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