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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Oct 14. 2020

나는 우울할 권리가 있어요


 어린아이가 부럽다. 꾸밈없는 솔직함이 부럽다. 아무렇게나 울고 웃어도 숨길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 부럽다. 내가 잊어버린, 한 번쯤 가졌을 ‘무아'의 삶을 사는 너희가 부럽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 선택의 여지 없이 구겨 넣어진 언어의 조각이 모여 나라는 자아를 만들었다.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게는 더 이상 사고하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언어를 주입하고 준 텅 빈 혼란의 덩어리를 나는 닥치는 대로 채워 넣었다. 사람들은 나를 떠받들었다. 좋다 싫다고 말만 하면 됐다. 원하면 손을 뻗고 싫으면 내던졌다.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제멋대로라며 고개를 저었다.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모두 고개를 저을까 두려웠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까 무서웠다. 원하면 기다리고 싫으면 참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인내심이라는 건 마음을 보이지 않는 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교육은 옳았다. 다들 인내심이 강한 사람을 좋아했다. 싫은 감정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면 안 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애를 쓰던 결국 떠날 사람은 떠난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신경 쓰기에도 너무 바쁜 세상이었다. 그때부터,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눈치'라는 말은 남의 마음을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힘이라 한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이제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치를 봤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을 신경 쓰고, 헤아렸다. 그러다 모두 돌아가고 혼자가 되어 알았다.  


 나는 나를 헤아리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밖에 모르던 내가 나를 잊어버리게 된 게.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는 저기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쪼그려 앉은 정강이를 두 팔로 감싸 안은 모습이 꼭 버려진 어린아이 같았다. 


 일을 마치고 온 엠마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정말 짜증 나.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자기들이 잘못해놓고 나한테 다 미루고 말이야. 이쪽은 이미 할 일 다 하고 남아서 도와주고 있는데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오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 정신이 하나도 없어. 진짜 다들 왜 그러는 걸까. 그러다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높이 들고 말했다.


‘미안해, 울 것 같아’


 우리는 언제부터 우는 걸 미안해했을까. 위로받아야 할 이들이 사과한다. 어른이 되고 많은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어린아이가 부럽다. 아직 너희밖에 모르는 너희가 부럽다. 아직 많은 걸 생각하지 못하는 너희가,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너희가, 다시 내일이 되면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뜨는 너희가 부럽다.



 멜버른에서 세 번째 직장에 다닐 때였다. 한참 일에 익숙해질 무렵, 한 회사 동료와 언쟁을 한 적이 있었다. 언쟁이라기보다 일방적인 비난에 가까웠다. 그동안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오해를 풀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근무시간이 끝나고 따로 면담을 청했다. 하지만 그는 완고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지 모르지만, 그는 전부터 내게 꽤 많은 불만을 품고 있던 듯했다. 다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니었다. 이해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고, 그런 내가 아니꼬운 듯 그는 나를 멸시하며 인격을 힐난했다. 듣도 보도 못한 근거 없는 이간질과 소문을 들먹이며 나를 공격했다. 나는 끝까지 들었다. 그게 예라고 배워서였다. 의미 없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게 예라고 배워서였다. 그는 자리를 떴고, 나는 억울하고 짜증이나 눈물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예를 차리고, 그러고도 이런 감정조차 일지 않아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회사에서 나와 빠르게 걸었다. 건물을 나오고 시야에서 벗어나자 눈물이 맺혔다. 이런 이유로 우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였다.


‘Hey, I’m sorry.’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티슈 한 통을 통째로 건네며 저렇게 말하고는 지나쳐갔다. 갑자기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오는 내내 꺽꺽 울었다. 택시기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어떤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당신의 눈물을 이해합니다.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세상에 들키지 않으려 꾹꾹 참았던 감정을 보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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