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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Oct 17. 2020

상공에서 보내는 하루


 이륙 한 시간 전,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걸음을 재촉했다. 도르륵 도르륵. 묵직한 보도블록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광활한 광장이 펼쳐진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꼽힌다는 공항이 유독 더 넓게 느껴진다. 전광판을 찾아 창구를 확인한다. CA219. 저 끝에 있는 창구를 향해 다시 걷는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빠르게 지나 여권을 스캔한다. 무인발권기는 세계의 축복이자 게으름의 뒷배다. 


 면세점은 생략하고 빠르게 지정된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인다. 숨을 좀 고르고 주위에 있는 USB 허브를 찾는다. 공항에서 배터리가 빨리 다는 건 내 착각일까? 가득 채우고 출발한 배터리는 어느새 반 이상 닳아버렸다. 부디 USB 포트가 있는 항공기가 걸리길.


 묵직한 캐리어를 겨우 욱여넣고 자리에 앉았다. 작은 창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든다. 불편한 코트를 벗어 무릎 위에 얹고 벨트를 채웠다. 찰칵. 쇳덩이가 맞물려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기체가 흔들리고 곧 이륙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구동을 시작한 항공기는 곧 솨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오른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안정적인 기류에 오르자 깜빡이가 꺼지고, 동시에 눈을 뜬 승객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렇게 상공에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사실 긴 비행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내리 자는 사람과 내리 깨어있는 사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비행이 잦은 사람은 깨어있게 된다. 특히나 나처럼 비행기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면 아무리 애를 써 잠들어도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깨고 만다. 삐딱한 자세로 불편하게 잠든 몸은 경직되어 뻐근하기 이를 대 없고, 피로가 정말 단 하나도 풀리지 않은 채 켜켜이 쌓여만 간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다 보면 몸이 망가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고문이 따로 없다.


 열두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갇혀있다 보면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귀찮은 일’이다. 서류작업이 많은 지루한 업무나, 아직 학교에 다닐 적에는 리포트를 쓰기도 했다. 유독 천천히 가는 시간은 지루한 업무나 두꺼운 책을 읽기 딱 좋은 환경이다. 어떤 일이든 세시간을 넘어가는 법이 없다. 비행기 모드의 위대함이랄까.

 사실 비행기가 탈 기회가 적었을 때는 작은 선망 같은 것이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이나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어딘가 멋있어 보였다. 이제는 평소보다 조금 불편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다섯시간 정도를 보내고 나면 슬슬 집중력과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다. 그러면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미디어를 탐색한다. 항공사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어떤 영화를 제공하는가. 보통 각 나라의 영화가 많이 제공된다. 그나마 미국 영화는 어디에나 보급되어 있지만, 외국에서 한국 영화는 정말 드물다. 그나마 있는 것도 업데이트되지 않은 옛날 영화뿐이다. 워낙 영화를 잘 안 보는 편이라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버티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나는 한국 항공사를 좋아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가 가득 들어있다. 여섯시간도 거뜬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밥이다. 특히 반나절이 넘는 비행에서는 보통 3.5끼가 나오기 때문에 정말 중요하다. 이른 아침에 타면 음료수, 조식, 음료수, 중식, 음료수, 석식을 주고 점심이나 저녁 후에 간식이 나온다. 반대로 저녁에 타면 음료수, 석식, 음료수, 간식, 음료수, 아침을 주는데 이 때가 제일 곤욕이다. 한밤중이라 잠만 자는데 계속 먹으니 더부룩하고 부대껴 영 불편하다. 맛있다고 다 받아먹다간 돼지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다.


 밀린 영화를 다 시청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스도쿠를 풀거나 테트리스를 한다. 오랜만에 하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꽤 재미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잘 만들었다. 영원히 유치해지지 않는 직관적이고 단조로운 구조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스도쿠를 풀다 보면 지도와 방송이 나오며, 드디어 상공에서 보내는 하루의 끝이 가까워짐을 알린다. 한 자세로 앉아있느라 허리는 부서질 것 같고, 엉덩이는 멍이 든 것처럼 아프다. 푹신하던 의자는 어느새 딱딱한 돌같이 변했다. 


 겨우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내린다. 관절 군데군데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뻐근하고 부자연스럽다. 과연 누워서 자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체험하는 순간이다. 

 하루 동안 신세 진 승무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통로를 지난다. 서늘한 공기에 불그스름한 아침 해가 하늘을 밝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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