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 갈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 꿀벌 Oct 24. 2020

인생의 쳇바퀴

휴가 정도는 마음 편히 가게 해주세요!


 흔들리는 지하철에 앉아있기를 한 시간. 정신없이 일하고 돌아오면 어느덧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월요병이 도지는 오늘 같은 날은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영화나 틀어놓고 저녁을 먹는다. 그러고 보니 넷플릭스 영화에 예쁜 남자배우가 나온다고 했었지. 그 배우가 겨우 16살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적어도 20살은 됐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요일 즈음 되면 밀린 일들을 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금 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예감. 그때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앉는다.


 사는 게 항상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며 나름대로 행복해지는 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무엇이든 불만족스러웠던 십 대를 지나, 무엇이든 감사하게 되는 이십 대를 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불평불만이던 그 시절의 나는 참 많은 걸 가지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할 줄 몰랐다. 이십 대가 되어 혼자 떨어져 살아가게 되면서 깨달았다. 누군가 차려주는 밥은 뭐든 맛있고,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그리고 이런 모든 사소한 귀찮음은 모두에게 배정되어 각자 오롯이 내 몫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이렇게 온종일 바쁜 날이면 이 모든 일은 뒷전이 된다. 인생의 패턴은 세 가지로 분류하자면, 과도기, 안정기, 그리고 침체기일 것이다. 늘 새로운 사건과 환경을 만나는 과도기를 지나, 겨우 익숙해지고 만족하는 안정기를 거쳐 이 모든 게 귀찮아지는 침체기에 도달한다. 그러면 그토록 바라던 안정을 걷어차고 스스로 과도기에 들어서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정말 귀찮은 성향을 가졌다. 

 지금 내 인생을 말하자면, 나는 과도기의 끄트머리 즈음에 서 있다. 사람마다 주기가 다르겠지만 나의 주기는 대체로 일 년이다. 석 달의 과도기를 거쳐 안정을 찾은 지 반년이 지나면, 늘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날들. 그러다 작은 의문이 싹튼다. 

 나, 이대로 괜찮을까? 

 한 번 싹튼 의문은 삶의 가치를 논하며 머릿속에서 토론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결국 일 년이 지날 때쯤, 그토록 열심히 가꾸어놓은 일상을 걷어차고 새로운 일에 뛰어들고 마는 것이다.


 내 논리는 그랬다. 적어도 삶을 되돌아봤을 때 큼직큼직한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 그런데 늘 같은 하루의 반복이라면 그 모든 게 뭉뚱그려 하나의 찰나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내 인생을 누군가 배운다면 어떨까? 이 사람은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회사에 들어가서 은퇴할 때까지 일하다 평온한 생을 마감했어. 정도라면 조금 아쉬울 것 같았다.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남기는 변곡점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학창 시절에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변화가 생겼다. 학기가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런 변화에 목마르기 시작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학기가 끝이 나야 하는데, 그만두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되는 학기를 살아가는 느낌. 결국 나는 주기적으로 직장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직의 가장 좋은 점은 사이에 짧은 휴가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음 일을 시작할 때까지 생기는 며칠, 혹은 몇 주의 기간은 내게 방학 같았다. 퇴직을 결정하면 늘 휴가 계획을 짰다. 멀어서 늘 눈 깜빡하고 돌아와야 하는 한국에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애들레이드나 퍼스, 태즈메이니아 같은 주변 도시를 여행하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특히 이직할 곳이 결정되고 가는 휴가는 걱정과 고민이 없는 찰나의 행복이었다. 


 싱가포르을 여행하던 중, 엠마의 일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엠마는 받아야 될 것 같다며 자리를 비우더니 한참 뒤에야 돌아오며 미안함을 전했다. 무슨 일이야? 하고 물으니, 


“아아. 실수한 것 같아” 


 엠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동료들에게 연락하며 수습을 부탁했다. 일이 일단락되자 엠마는 큰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여기 온 거, 아무도 모르거든. 여행 가는 걸 알면 선물 사가야 한단 말이야. 근데 이제 알았겠지? 뭘 사가야 하나…”


 그런 규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행을 갔다 올 때면 부서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관습 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프랜차이즈 커피라도 돌려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커피보다는 작은 기념품이 싸게 먹히지. 그렇게 말하며 엠마는 싱가포르에서 많이 사 간다는 ‘뿌리기용 기념품'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행 기념 선물을 돌리는 풍습은 호주에도 있었다. 다만 사 오지 않으면 눈치를 봐야 하는 건 아니었다. 의무라기보다는 휴가를 다녀온 사람이 여행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건네는 약간의 여흥 같은 것이었다. 


 여행을 와서까지 회사 눈치를 봐야 하다니! 누군가 호의로 시작했을 선행이 이런 식으로 자리 잡아 버린 것이 안타깝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공에서 보내는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