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만들어낸 착각, 퀸스타운의 밤
무거운 문을 열고 쭈뼛쭈뼛 중앙에서 세 번째 줄에 자리를 잡는다. 드르륵. 의자를 빼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건 기분 탓일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공기는 조만간 사라질 낯섦의 기운이다. 듬성듬성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하나둘, 뒤늦게 온 사람들이 공석을 메워간다. 강연장은 여기저기서 속삭이듯 가벼운 인사말이 들릴 뿐,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벽에 걸린 시계만이 톡톡 부지런히 흘러갈 뿐이다.
두시 정각. 적막을 깬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당당한 워킹이었다. 또각또각. 영화에나 흐를법한 구두 굽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중년의 여자가 강단에 오른다.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적당히 살집이 있어 건강한 느낌을 자아내고, 살짝 올라간 입가와 자신에 찬 눈빛은 한눈에 그녀가 멋진 사람임을 말해준다. 이 묘한 긴장감이 익숙한 듯, 그녀의 스피치가 시작된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처음 들어선 곳, 낯선 공기 속 익숙한 풍경. 분명 처음인데 언젠가 와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이 장면, 분명 본 적이 있어.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저 사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공간이 불현듯 기억의 한 공간을 스쳐 간다. 낯선데 익숙한 기분.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데자뷔(Déjà Vu)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생각보다 꽤 많이, 꽤 자주 나타난다. 오늘 처음 겪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전에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처음 보는 데도 언젠가 봤던 것만 같은 기시감.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혼란을 일으켜 겪게 되는 감정, 예지몽, 많은 설과 다양한 이유로 나타나는 이 현상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인연을 예감케 한다.
어릴 적 나는 이 현상이 나타나는 모든 일을 운명이라 여겼다. 내가 여기에 와야 했기에, 온 적이 없음에도 익숙함을 느끼는 걸 꺼야.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나는 기시감을 느꼈던 장소를 여러 번 방문하게 되었고, 적을 두게 되었으며,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내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처음 도크랜드 항구를 거닐었을 때,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새로운 학교 교실에 들어섰을 때, 테카포 호수 벤치에 앉아 멍하게 호수를 바라봤을 때… 생각해보면, 유독 혼자 있을 때 기시감을 느꼈던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 함께 하는 장소, 함께 하는 시간은 옆에 있는 그 사람에게 온 신경과 시선을 쏟아 나의 기억을 더듬을 틈이 없었던 탓일까.
혹은 내가 지금 혼자 하는 이 여정이 내게 위험하지 않으리라는 직감 같은 것을 익숙한 느낌으로 알려주려는 동물적 육감 같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위험한 순간만큼은 어떤 기시감보다 큰 위기감이 되어 나를 덮쳐온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감각은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함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대게 그런 감각은 착각이다.
여자의 직감은 무서울 정도로 잘 맞는다고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헛다리가 대부분이다. 엄청난 위기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던 빨간 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퀸스타운의 밤, 까만 도시에 듬성듬성 반짝이는 불빛 속에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어둠 속에는 그 어떤 위험도 도사리고 있지 않았다. 그저 신경 쓰느라 잔뜩 긴장한 나의 심신이 지쳐갈 뿐이다.
결국 다양한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곳곳의 첫인상이 어떤 감각을 조성할 뿐, 믿을 만한 정보는 아닐 것이다. 감정적 대응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감각을 무시하지 못하는 건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럼에도 이런 근거 없는 감각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회와 아름다운 광경을 앗아갔을까 생각하면 어느새 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 시간을 곱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