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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Jan 08. 2021

어른이의 연애에 밀당은 없다.

사랑 싸움이 귀찮은 어른이의 일상이란



어릴 때는 참 용케 사랑싸움을 했다. 사소한 일에 질투하고 괜히 툴툴거리고 그러다 정말 마음이 상해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용케 그 귀찮은 짓을 수없이 반복했었구나 싶다. 아마 이십대 중반까지도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기대와 여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넘치지는 않지만 충분한 시간과, 밤새 핸드폰을 붙잡고 열을 올려도 출근할 수 있는 체력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소한 서운함은 쌓이고 쌓여, 상대를 보는 시각마저 바꾸어 놓았다. 내가 좋아하던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싫어하게 되는 어디 판에나 올라올 것 같은 이야기들은 다 나의 이야기였다. 

사교성이 너무 좋고 말주변이 뛰어나 홀딱 반해 버렸던 그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인기쟁이였다. 처음에는 그런 면에 이끌려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나다보니 여간 피곤한게 아니었다. 마음이 없어도 여자가 혹 하도록 재치를 보이고,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선을 긋는 그는 일부러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누가 용기라도 내면 쿨하게 거절하는 그가 점점 아니꼬와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도 없는데 왜 저렇게 친절한거야? 그 친절 나한테나 좀 써보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의 사회생활이었다. 그냥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연스럽게 익힌 습관이었다. 그걸로 툴툴대는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면 조금 미안해지다가도, 내가 했던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지 싶다. 

결국 그와는 그런 사소한 감정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누적되어 헤어졌다. 작은 서운함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그 사람을 형성하는 이미지가 되어 버린다. 그 사람만 보면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같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런 시절을 보내고, 이제 이십대가 얼마 안남은 나는 이제 밀당 따위는 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애인의 사생활은 되도록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문자가와도 전화가 와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어른이가 되어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악을 써도 가만히 있어도 바람필 사람은 피고, 안 필 사람은 안핀다는 것이다. 그나마 바람피는 걸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가 잃기 싫은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바람을 피는 사람들은 대게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핀다. 최악의 경우 헤어지면 헤어지는거지 뭐. 이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 여자도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바람을 방지하는 최고의 방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바람을 필 경우 어떤 여지도 없이 떠날 거라는 확고한 태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핸드폰을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계속 신경이 쓰인다. 문자가 와도 전화가 와도 신경 쓰이고, 이성의 목소리라도 들리면 누군지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 물어야 하는건가. 생각만해도 골치아프다. 

스스로 부정의 블랙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자잘한 질투에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이제 어느정도 연애에 질리고,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 싶을 때 만난 사람들. 나는 그 무리에 있다. 

이제 우리는 연애가 얼마나 귀찮고 소모적인 일인지 알기에, 같이 있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으면 절대 만나지 않는다. 단순히 외모에, 말주변에, 직업에 끌려서 만날 수 없다. 무엇이 됐든 그 사람이랑 있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질투를 하는 대신 걱정을 한다. 상대방이 쓸대없이 소모적인 애정공세를 할랍시면, '아니야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센스. 얘를 들어 밤 늦게 야근을 하고 끝난 밤 보고싶다는 연락에 '지금 당장 갈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쩌다 감정에 빠져 그럴 때면, '아니야, 내일 출근해야하는데 힘들잖아.' 하고 만류한다. 그럼 상대도 더 애쓰지 않는다. 서로 잘 알고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무리하면 관계는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이때쯤 되면 연애하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 쓸데없는 걸로 싸우기 보다, 사소한 배려와 상대의 적당한 거절과 거리두기를 감사히 여긴다. 


이제 우리는 '그의 모든 걸 알고 싶어!'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가릴 건 가리고 살자"


그렇다고 상대의 부정적인 면모를 보면 정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되도록 오랫동안 상대와의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제는 '너가 일 그람이라도 없어지는 건 싫어' 라는 말보다 '너가 다이어트를 한다면 대 환영이지' 라는 말에 웃는다. 


솔직하고, 편하고, 담백하고, 적당히 거리를 지킨다. 친구사이에도 보이지 못할 것을 다 보여주고 이해하라고 강요하기 보다, 가릴건 가리고 지킬건 지키면서 편하게 사랑한다. 괜한 자존심 따위 없다. 이제는 내 감정이 지치는 것보다 상대에게 '무례했나?'라는 생각이 먼저들어 사과부터 하고 본다. 

빠른사과는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사회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감정을 쌓아두꼬 꽁해 있지도 않는다. 어떤 식이든 표현을 해야한다. 어차피 말하지 않으면 평생 모를거라는걸 이제는 안다. 


나만 그런다고 그런 연애가 되냐고? 안된다. 상대도 그래야한다. 그래서 그런 상대만 만난다. 아직도 작은 문제를 안으로 꿍 쌓아두다 나중에 혼자 폭발해 뜬금없이 화를 내는 사람과 연애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정말 '늙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화를 내는 것도 힘이 있고 체력이 받춰줘야 할 수 있는 짓이다. 



아직도 일희일비하며 온갖 감정을 오르내리고 있는 연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감정도 언젠가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감정임을, 하지만 또한 지나간 감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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