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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Nov 03. 2021

그 곳에서는 평일 점심에 스테이크를 먹는다.


한국과 외국 생활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역시 식생활이다. 한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래도 꽤 열심히 한식을 찾아 먹었다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나의 주식은 역시 스테이크였다. 스테이크용 고기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굳이 내가 사 먹지 않더라도 스테이크를 먹을 일이 많았다. 커피, 와인, 스테이크. 호주에 살면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을 꼽자면 이 세 개가 아닐까?


나라를 막론하고 직장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점심 메뉴다. 하루 중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는데, 늘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는 우리들의 하루는 얼마나 무료한 걸까. 그러다 결국 색다른 메뉴를 찾지 못한 채, 가까운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게 되리라. 

지금껏 호주와 한국에서 약 다섯 군데의 회사에 다녔다. 보통 점심시간은 한 시간, 짧으면 삼십 분, 가장 길었던 곳이 한 시간 반이었다. 사내 식당이 있으면 주로 그곳을 이용했고, 사내 식당이 없으면 보통 푸드 코트가 있었다. 사내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곳,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사 먹어야 하는 곳,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곳도 있었고, 원하는 메뉴를 뭐든 사주는 곳도 있었다. 


회계 사무소에서 근무하며 나는 거의 매일같이 두 잔의 커피와 한 끼를 먹었다. 매일 아침, 같은 사무실을 쓰는 직원이 모두 출근하면 다 같이 커피를 사러 내려갔다. 보통 아침 아홉 시쯤 회의가 있었고, 커피를 마시며 회의가 진행되었다. 모두의 커피 취향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한 사람도 같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소이 플랫 화이트(soy flat-white), 카푸치노에 설탕 두 개, 헤이즐넛 아메리카노 등, 정말 단 한 사람도 취향이 겹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일 할 때는 깜짝 놀랐다. 처음 커피를 주문할 때 일일이 취향을 물었지만 모두 같은 대답이 돌아왔던 것이다. 


"저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이렇게 간단할 수가! 다음부터는 그냥 인원수대로 아아를 주문했다. 아마도 커피의 차이가 가장 크지 않았나 싶다. 호주는 산미가 강한 커피를 많이 사용하고, 화이트 커피(white-coffee, 우유가 들어간 커피)가 유명하다. 카페에서 이 년을 넘게 일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시키는 메뉴는 당연 라떼, 그 다음이 플랫 화이트와 카푸치노 였다. 

한국에서 아아를 무더기로 주문하며, 한국 카페에서 일하는 건 좀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고 그게 한국인의 특징이냐 생각하면 그건 아니다. 멜버른에 있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자기 취향의 화이트 커피를 알고 있다. 맛의 차이도 있겠지만, 아아를 마시는 것 역시 한국의 문화가 아닐까?


언제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커피는 선임이 법인카드로 결제했다. 한번은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해 내가 결제하려 하자, 선임이 말했다.


"굳이 돈 쓰지 마요. 혹시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돈 주고 사 먹게 되면 회사에 청구하고."


물론, 이건 당연한 복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가 내는 건 아니더라도, 보통 선임이 커피를 사주는 문화는 관례처럼 호주에 있는 여러 회사에서 행해졌다. 마찬가지로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 친구들은 취직한 이후 회사에서 돈 주고 커피를 사 먹은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점심도 다르지 않았다. 한 시간이라는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조금 멀리 있는 곳에서 밥을 먹느라 한 두 번 시간을 어긴 것에 까다롭게 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시간을 걱정하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먹으라'며 안심시켜 주고는 했다. 

점심으로 가장 많이 먹었던 메뉴 중 하나는 스테이크. 그중에서도 나는 안심 스테이크를 많이 먹었다. 회사 길 건너편에 조금 큰 양식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날이 좋을 때면 그곳에서 스테이크와 레몬라임비터(Lemon Lime Bitter, 칵테일 부류의 탄산음료)를 먹었다. 그 밖에도 쌀국수, 스시, 국밥 등을 찾아 먹었지만, 한식을 먹으려면 꽤 오래 걸어야 했기에 그리 만만한 메뉴가 아니었다. 그에 비해 브런치나 스테이크는 모퉁이만 돌면, 길만 건너면 그곳에 있었다. 


날이 좋을 때면 문을 환하게 열고 햇볕을 받으며 고기를 썰 수 있는 그곳은 회사에서 가장 많이 가는 단골집이었다. 각 부위의 스테이크와 먹물 파스타, 그리고 피자와 와인이 맛있는 그곳은 호주에 있는 여러 양식 가게 처럼 바와 식당을 동시에 운영했다. 카운터에는 몇가지의 탭 비어(tap-beer, 생맥주)가 있었고, 간단한 칵테일과 위스키, 와인을 취급했다. 물론 점심에는 술을 먹을 일이 없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레몬라임비터는 칵테일을 취급하는 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음료였다. 

레몬에이드와 비슷한 맛이 나면서도 적당히 달고 톡 쏘는 시원한 청량감이 있어,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면 늘 이 음료를 찾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볼 수 없었던 이 음료는 비터라는 붉은색의 리퀴류를 끝에 살짝 넣어 만드는 무알콜 칵테일이라고 했다. 가끔 초록 병에 'Lemon lime bitter' 라고 쓰인 음료를 볼 수 있는데, 초록 병에 담긴 그것과는 아주 다른 맛이라는 걸 밝혀둔다. 나의 최애 음료였다. 오세아니아에 나갈 일이 있다면 꼭 마셔보길!


한국에서 밥과 면이 가장 흔한 것처럼, 호주는 스테이크와 치킨 파마(Chicken Parma, 튀긴 닭가슴살에 토핑을 한 음식)가 가장 흔했다. 가끔 호주의 음식이 Fish & chips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가장 대중적인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테이크는 웬만한 음식점에 항상 있었고, 나의 주식이 되었다.

점심에는 스테이크와 레몬라임비터를, 저녁에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었다. 적어도 삼일에 한 번, 많게는 하루에 두 번도 먹었던 것 같다. 물론 사먹는 스테이크는 그리 저렴한 가격이 아니었지만, 내가 내는 것도 아닐뿐더러, 다른 음식이라고 특별히 싸지도 않았기에 가격 측면의 거부감은 없었다. 


게다가 스테이크용 고기를 집에서 구워먹는 건 아주 흔하고 아주 쉬운 요리였다. 한국 마트에서 불판 구이용 고기를 파는 것처럼, 호주 마트에서는 어디에서나 스테이크용 고기를 팔았다. 부위별로 가격은 달랐지만 나는 주로 oyster blade fillet(부챗살)과 scotch fillet(등심)을 사 먹었다. 부챗살은 주로 깍뚝썰어 찹스테이크를 해먹고, 등심은 그대로 스테이크로 구워 먹었다. 둘 다 1kg에 30불, 약 2만 5천 원이면 구할 수 있었고, 조리하기도 너무너무 간편했다. 게다가 유통기한이 다가와 세일을 할 때는 더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담하건데, 훨씬 맛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에서 먹는 아웃백 스테이크와 비슷한 맛이다. 그런 두꺼운 육질의 고기를 아무 마트에서나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트가 이러한데 고급 레스토랑은 어떤가.


그렇다 보니 오히려 스테이크보다 구워먹는 한국식 구이가 훨씬 비싸게 느껴졌다. 한국 식당이나 한국 정육점을 찾아가야만 살 수 있었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호주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다면, 여자 둘이서 배부르게 먹지 않아도 십만 원은 쓸 각오를 해야 한다. 그에 비해 스테이크는 잘만하면 삼, 사만 원에 둘이 배불리 먹을 만큼의 고기를 구할 수 있다. 가끔 한국식 불판 고기가 그리워 찾아 먹기는 하지만, 역시 주식은 스테이크였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동네 가게에서 스테이크용 고기를 샀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고기를 잘 못 골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호주 아무 마트나 들어가서 아무 스테이크용 고기를 짚어서 먹어보면 바로 알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스테이크를 구워먹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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