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이 없네요.”
말해 놓고 스스로 놀랐다. 아무리 아파도 메뉴 선정에 대해서는 진심이었던 내게 이런 날이 오다니?
심지어 숙취로 속이 안 좋다는 것이 어떤 건지도 모르던 내가.
나는 모두가 인정하는 대식가였다. 학창 시절 급식시간에 식판 한가득 배식받기 위해 조르는 것도 모자라, 먹고 다시 돌아와 눈치 보며 다시 받아가던 학생. ‘키도 작은데 그 많은 양을 어떻게 다 먹냐’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위대(�大)하다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재수생 때, 문득 주위를 둘러봤는데 키가 180cm이던 남학생이 나와 비슷한 양의 식판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민망한 적도 있다. 식곤증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 깨기 일쑤였다. 속상했지만 식사를 줄일 수는 없었다. 난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니까!
간혹 하얗고 야리야리한 친구들이 ‘난 많이 먹으면 속이 너무 안 좋아. 소화가 잘 안돼.’ 라며 깨작깨작 먹는 모습을 보면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자고로 라면은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 입안이 가득 차도록 넣고 우물우물 씹어야 먹는 맛이 났다. 뜨끈한 반찬과 밥을 5:5 혹은 6:4의 비율로 집어 먹을 때 입안 가득 퍼지는 식감을 저들은 모른다는 것인가? 그들의 타고난 몸매는 후천적 식습관 덕분일 것이다.
한때는 맛집 찾아 도장깨기 하는 것이 행복이었다. 이사가 잦았던 20대에는 새로운 동네로 진입하기 전 어느 음식점을 가볼지 리스트 검색하는 취미를 즐기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먹고 싶은 게 사라졌다.
TV나 유튜브에 나오는 먹방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패널들의 구체적인 묘사가 와닿지 않는다. 그저 설탕 맛, 매운맛, 밀가루 맛 일거라 짐작해본다. SNS에 올라오는 맛집 소개를 읽어봐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잘 공감이 되지 않는다.
시국 때문에 외부 식사는 자제하고 있으나 배달 메뉴 선정도 고역이다. 아무리 어플을 뒤져봐도 “이거다!” 하고 끌리는 것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옆사람에게 골라달라고 말해본다.
(회식에서 아랫사람더러 메뉴를 정해보라고 하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인가?)
당혹스럽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속이 비어 있으면 피곤해도 밤에 잠들기 어렵기 때문에 뭐라도 채워 넣는다. 점심을 거르면 오후에 저혈당 증세처럼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리기 때문에 꾸역꾸역 먹어야 한다. 이제는 먹기 위해 살지 않는다. 살기 위해 먹는다.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던 건 그만큼 어렸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가 정해 준 바운더리 안에서 살포시 내게 주어진 과제들만 해결하면 됐었는데. 예쁜 정원에서의 안락하고 평화로운, 소풍 같은 나날이었다.
지금은 직접 땅을 개간해야 한다. 잡초를 일일이 다 뽑고 하루도 쉬지 않고 물을 주고 가꾸고 돌봐야 이 거친 정원이 내일까지 버틸 수 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내가 책임지고 해내야 한다. 항상 긴장 상태다. 언제 뛰어나가 일해야 할지 모르니 차라리 공복이 낫다. 味의 욕구 충족은 일차적으로 마음의 여유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
문득,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