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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Jun 09. 2017

방황하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듯이

프로 방황러가 전하는 방황의 기술

<주의!> 이 글에는 높은 수준의 냉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서른 살이 되어 아직도 뭘 해야 할지, 진로를 고민하는 내게 “너는 방황 제일 잘하니까 방황 전문가 해”라고 말해줬다. 생각해보니 그럴싸했다. 집으로 돌아와 프로방황러로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효과적인 방황을 위한 원칙 5가지를 정리해보았다.


1. 막연한 미래를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하지 말 것

흐릿하고 산만하게 미래를 생각하자 / Wikimedia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는 것은 방황의 적이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그릴수록 방황하기 어려워진다. 막연하게 생각해라. “뭐, 잘 되겠지” “나는 이미 망했어” 같은 말들은 막연한 미래를 암시하는 대표적인 표현들이다. 단 이때에도 그 생각에 너무 집중하면 안 된다. 집중하면 그 생각을 대체할 구체적인 미래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막연한 미래와 함께 산만한 일상을 보내면서 구체적인 비전을 멀리하자.


2. 우선순위를 세우지 마라

얘들아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일이란게 순서대로 안돼 / Wikimedia

뭐가 중요한지 알게 되는 순간 방황은 끝이다. 다 중요하거나 다 필요 없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한다는 자세로 세상을 살자.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순간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게 되리라. 또 모든 것이 다 의미 없다는 냉소적인 태도야말로 인간적인 고립과 소외를 확고히 하는 지름길이며, 당신의 방황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훌륭한 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달력, 시계, 일정관리 앱 따위는 잊어라. 우리에게는 평일과 휴일의 구분도 밤낮의 순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 순간의 영원한 불안만이 방황의 나침반이 되어주리라.


3. 이타적이 돼라

기꺼이 누군가의 호구가 되어주자 / Wikimedia

다른 사람이 부르면 만나라. 그들이 원하면 주어라.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자. 열정 페이는 이 시대 가장 완벽한 이타주의의 전형이다. 단 이때 나의 이해관계나 감정을 신경쓰면 안 된다. 이타주의는 영원한 방황의 충분조건이다. 세상은 언제나 호구를 원한다. 착취에 대한 수요는 무한하며, 내 삶을 타인에게 내맡기는 순간 방황의 칠 할이 달성된 것이다. 


위대한 성현들은 내 육체와 정신에 대한 통제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맡김으로써 평화와 안식을 구할 것임을 설파했는데, 여기서 헷갈리면 안 된다. 만약 당신에게 가진 것과 나눌 것이 많다면 이타주의는 오히려 당신의 방황을 쇠퇴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면 명예와 인정을 누리며 안정적인 삶에 정착하게 될지 모른다. 명심하자. 쥐뿔도 없는 이만이 자기 삶을 타인에게 내맡길 때 끝없는 모순과 착취의 늪에서 방황의 정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4.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다른 사람도 믿지 말자

닝겐도 인생도 혼자 / Pexels

풍요로운 방황을 누리는 데 있어 인간에 대한 믿음은 암적인 요소다. 앞서 이타주의를 설명할 때도 다루었지만 나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내 감정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은 방황에 큰 독이 된다. 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내 감정 또한 바깥 세계가 내게 심어준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자.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끝없는 방황의 든든한 우군이다. 소중히 지켜야 할 내면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방황을 끝내는 치명적인 오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믿어서는 안 된다. 내 불안과 두려움을 완벽하게 이해해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새겨야 한다. 세상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가는 곳이며 그 홀로됨의 과정에서 함께하는 것은 오직 하나, 방황뿐이다.


5. 노력과 끈기는 아무 것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다 노력한 사람들이지만 노력한 사람들이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성공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노력을 뺀 다른 것들에 대한 보상이다 / Wikimedia

원하는 것이 있는가? 포기하라.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고 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건 이 시대의 영원한 진리다. 바라는 것을 향해 노력하고 매달리지 말라.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믿고 무엇 하나 원하는 것이 없을 때 진정한 방황이 가능하다. 희망과 기대를 갖는 순간 방황은 동력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아, 한 가지 예외는 있다.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열등하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에 매달리는 것은 방황의 길로 향하는 훌륭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남들보다 우월해지거나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 아래에 있는 불안과 불만족, 투사되고 환유된 자본의 욕망에 쉼없이 응답함으로써 방황의 고리를 계속 이어가자. 너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이나 나 자신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순간 방황은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프로페셔널한 방황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적당히 하다가 포기하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다. 프로 방황러가 되려는 분들의 건승을 기원하며 글을 끝맺는다.



장성산 | 서울에서 갖가지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납니다. 커뮤니티빌딩과 사회혁신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피드백과 기고 제안을 환영합니다.


페이스북, 메일주소 lallacri86 at 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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