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반복되는 인생의 덫을 치유하는 방법
내게는 덫과도 같은 반복되는 삶의 패턴이 있다. 그 패턴들을 덫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에 사로잡히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어떤 패턴이 반복된다.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상처받은 어린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받았던 상처를 달래고 어루만진다. 상처가 나으면, 나도 덫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과정은 어렵다. 시간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오류를 반복하는 내 행동을 카메라로 촬영해서 틀어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웃긴지 알 수 있겠지만, 반복되는 행동은 보통 나도 모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덫이다.
빈 집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 나를 떠나간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를 원망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몰두한다. 그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지만, 돌아온 후에는 다시 나를 떠나갈 것이다. 내게 사랑이란 잠시 왔다 스쳐가는 것이고, 아무도 없는 빈 집에 앉아 상상하면서 만들어낸 세계야말로 진짜 내 세계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의 느낌을 묘사하면 위와 같다. 저 생각은 너무나 우습다. 인간은 영원히 집 안에서 살 수는 없다.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집 안에 머무르고 싶다. 바깥은 너무 무섭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아본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영원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이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환상이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삶이 자기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은연중에 자신의 환상이 옳았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 역시 세상은 무서운 곳이야, 믿을 놈 하나 없어, 그래 나는 여기에서 별볼일 없는 사람인 게 틀림없어 등등. 집으로 돌아갈 핑계를 무한히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을 때 '참 이상하다'는 말을 들음직한 정신세계라도, 그것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익숙한 것이 되어버린다. 논리를 담당하는 대뇌피질은 언어로 잡아낼 수 없는 기묘한 영역에 자리한 우리의 무의식에 쉽게 휘둘린다. 무심한 부모는 나쁜 부모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부모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최초의 관계를 경험한 우리는 어느새 무심한 사람을 연인으로 선택하는 자기를 발견한다. 인생의 덫과 불행에 중독된 자아는 이렇게 탄생한다.
불행에 중독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상처에 집착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찾아 "괜찮다"고 말하고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매일매일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바꾸어나간다. 그 아이에게 "너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자유가 있고 그 행복은 상처에 매달리는 동안에는 절대 회복될 수 없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관계 속에서—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더 나은 관계 속에서—삶을 개선해나갈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는 한 절망은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상처는 내 친구이며, 나는 그 상처가 잘 아물도록 지켜볼 것이다. 그 와중에 다른 상처로부터 나를 잘 지켜낼 것이다.
장성산 | 서울에서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납니다. 커뮤니티 빌딩과 사회혁신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피드백과 기고 제안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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