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유리를 끼운 출입문 너머로 벽에 걸린 위패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자로 육군일병 아무개, 해군하사 아무개라고 적힌 조그만 위패들이 어림잡아 수백 개 정도 돼 보였다. 충혼탑이 세워진 위령 공원에는 나 말고 아저씨 한 사람이 스트레칭을 하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고요하달 수도 없이 괴괴한 가운데 잠시 고개를 돌리면 겨울바람에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높이 이십미터 쯤 되는 탑 뒤편의 조그만 공간에 위패와 함께 꽃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나는 유리 너머로 어둑한 안쪽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다섯평 남짓한 공간 안에 출입문 쪽을 제외하고 디귿자 모양으로 들어찬 꽃들은 싱싱했다. 의병장 손 모의 증손 아무개라고 적힌 리본이 달린 꽃바구니도 있었다. 그러니까 울진 출신의 항일운동가, 한국전쟁 전사자들이 모셔진 이곳을 기억하고 꾸준히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새삼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냥 이곳은 별다른 일도, 두드러지는 기억도 역사도 희미한 시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러할 뿐만 아니라 나와 연관된 대부분의 것 — 예를 들면 고향 울진이라던가 — 에 매우 팍팍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말았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개인을 추념하는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나는 그냥 뒤에 두고 자꾸만 잊으려고 했다. 이곳은 서울은 아니므로, 내가 더 이상 구할 것도 기억할 것도 없는 것이므로... 라는 핑계를 대며.
위치를 보면 이 충혼탑과 공원은 신사가 위치했던 곳이 분명하다. 올라오는 계단이나 주변을 쉽게 조망할 수 있는 높이나 맞춤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마지막으로 왔던 게 언제였을까? 초등학교 바로 뒤에 있지만 외진 골목을 지나 언덕을 올라야 올 수 있는 곳, 망월동 국립묘지 같은 데를 (아는 누군가가 묻혀 있지 않다면) 안 가는 것처럼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해도 충혼탑을 굳이 찾을 까닭이 없었다. 현충일 행사 때 두 번인가 왔던 것 같은데, 그 외에 여길 올라왔던 건 한 손에 꼽아도 손가락이 남을 것 같다. 그런데 오늘 거길 그냥, 고향에 왔다는 핑계로 걸어올라가 보았다. 안 가던 골목을 지나, 안 오르던 계단을 올라서, 높은 탑 뒤에 있는 조그만 위령 공간도 들여다보았다.
그곳들을 돌아보며 어쩐지 글을 쓰고 싶었고 오늘 다녀온 기록을 오래간만의 일기로 남긴다.
풀어낼 이야기들이 참 많은데 그것들을 다 담지 못한 듯해 마음이 조금 답답하다. 그러나 답답한 것조차도 괜찮다. 얼마 전 친구가 시무룩한 표정의 나한테 해준 말, “기분 나쁜 것도 괜찮아!”라는 말을 떠올린다. 정말로 그것조차도 괜찮다. 삶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