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스 사람들 <1> 성수동에서 만난 썬
편안하고 유쾌한, 무엇보다도 안전하게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는 디모스가 좋아요. 이런 디모스가 지속가능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멤버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더 가지고 싶어요.
—— 썬이 들려준 이야기 중에서
25일 썬을 만나러 가는 길, 자욱한 미세먼지를 보며 나는 "이대로 한국에서 사는 것이 괜찮을까?"라는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성수동 뺑드에코에서 한 시간 반 가량 썬과 이야기를 나누며 '지속가능한 디모스'의 모습을 그리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삶의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속가능성을 일찍부터 말해온 가장 큰 기관은 아마도 유엔일 거다. "지구마을에서 우리가 계속 살아가려면 뭐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제시한 것이 '지속가능발전목표'다. 이 목표가 제시하는 지속가능성의 핵심은 생존과 번영의 기반을 지속시키는 방식의 발전이다.
상식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유엔에서 제시한 내용인만큼 많은 나라들이 공식적으로는 이를 지지한다. 하지만 해석은 조금씩 다르다.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각국이 처한 상황 때문에 다른 접근을 하는 듯 보인다.
디모스는 올해 초 1주년 기념모임 후, 온오프라인으로 1년 간 소셜 투자를 진행한 내용을 회고했다. 이 회고를 토대로 기존 방식을 보완해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지난 2월 모임에서,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 진행 전에 구성원들 각자가 디모스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을지를 공유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 부분이 정리될때까지 투자 프로젝트 진행도 잠시 중단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난 3월 모임에 참석한 멤버들은 자신이 바라는 디모스 활동의 참여 영역과 방식, 수준을 구체적으로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 모임에서 멤버들 각각이 디모스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디모스에서 마음을 내서 할 수 있는 일로, 한 달 동안 사람들을 만나고 내용을 정리하는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고 싶었다. 디모스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멤버 모두의 입장과 상황을 정리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근황을 공유하고 각자의 관심사를 나누는 지난 1년 동안 디모스라는 모임의 독특한 성격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은 입을 모아 "이곳에서 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만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멤버들 각각이 디모스에 갖는 바람을 정리해보기로 한 것.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디모스 매거진에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실으면서, 누군가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기쁨과 만족의 경험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나누려고 한다.
그 시작으로 지난 주 사이 스타와 썬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타와의 대화는 미진한 부분이 있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썬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한다.
‘소셜 벤처 밸리’인 서울시 성수동에 자리잡은 임팩트 투자 기관에서 4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책, 빵과 커피, 여행을 사랑합니다. 최근에는 여성으로서의 나에 대해 탐구 중이며, 자신만의 색깔로 ‘목소리’를 가지는 다양한 시도에 관심이 많습니다.
<더불어 행복하게, 성수동 마당발 썬입니다>, 썬의 자기소개를 2018년 버전으로 업데이트
디모스 1년 여간 이직과 퇴사, 재취업 등 모든 멤버들이 소속 변동을 겪는 동안에도 썬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성수동에서 임팩트 투자 일을 하는 동안 자신에 무엇이 더 필요한지, 어떻게 성장해나갈지를 모색하던 가운데 최근 미네르바 대학 대학원 과정 등록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4층 건물로 된 뺑드에코 2층에서 크루아상과 치아바따를 사서 3층으로 올라갔다.
집사 이름이 독특한데요. 그리스에 있는 학교인가요?
썬 (헛웃음) 많이들 그렇게 얘기하시는데 아니구요. 대안적 형태의 고등교육을 제공하자는 취지로 설립된 곳이예요. 이번에 공개모집으로는 처음 학생을 뽑는데 온라인 파트타임으로 일도 병행할 수 있고...
집사 어떤 학교길래?
썬 이름만 크고 알맹이는 없는 교육을 바꿔보자는 취지로 설립됐어요. 교육 내용의 폭이 넓은데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건 크리티컬 띵킹과 크리에이티브 띵킹. 기존 재학생과 교수들 말로는 생각하는 방식과 태도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집사 전부터 대학원을 가고 싶었어요?
썬 학위 욕심이 있어요. 학부때 경제적인 이유로 유학을 가지 못한 게 한처럼 남은 것도 있고.
집사 전공은?
썬 어플라이드 애널리시스 앤 디시전 메이킹. 프로그램의 기본 베이스는 데이터 사이언스와 비지니스예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자료 기반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거?
집사 의사결정을 잘 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평소 관심을 가져온 쪽이예요?
썬 그것보다는, 기존 대학들 둘러보다가 내 넓고 얕은 관심사를 한번에 포용해줄 학과가 안 보였어요. 공공정책 전공으로 몇몇 대학에 지원준비를 하는데 자기 소개서가 안 써지는 거예요. 내가 왜 이 학과를 지원하는지에 대해서.
집사 내 생각에 썬에게 꼭 필요한 전공인 것 같네요. 졸업하면 자기 관심사에 맞는 학교를 결정할 수 있을 듯.
썬 맞아요ㅋㅋ 내가 얼마나 의사결정 내리는 걸 못하면 이걸 전공으로까지 하려고 하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제 단점이 두 가진데 우유부단한 것과 결정을 미루는 거예요. 오죽하면 대학 시절 친구가 “자신있게 결정하라”는 제목의 책을 생일선물로 줬어요. 자신있게 결정하라고… 미네르바 대학도 이번 달 31일이 등록 마감인데 결정을 계속 미루고 있어요.
집사 그러다가 학교를 다니면서도 '이걸 해야 하나 마나 가지고 계속 고민하는 거 아니예요?
썬 일단 등록을 하고 나면 열심히는 할 거예요. 그 커밋먼트를 하기까지 결정을 내리는 게 조금 두렵죠. 일단 결정하게 되면 그 생활을 잘 누리기 위해 몰입해서 “왜 이선택을 했지?” 하고 후회는 안 할 거예요. 결정 전까지는 망설이지만 이후에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편이거든요.
집사 좋은 결정을 내리면 좋겠네요.
대학원 진학 여부에 관한 최근의 고민을 듣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이거 어떻게 다 먹어?'라고 생각했던 빵을 깨끗이 먹어치운 서로를 아주 칭찬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집사 디모스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겠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썬 외국 나가는 디모스 분들이 은근히 많잖아요. 외국이 아니더라도 어딘가를 다녀와서 받은 영감을 나눠받고 싶어요. 저도 치앙마이 다녀와서 그곳 분위기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디모스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근황토크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더라도 전부 할 수는 없죠.
집사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썬 예를 들면 스타는 유럽 여행에서 페미니즘 책 사와서 같이 돌려봤었죠. 혬은 뉴욕에서 작은 서점을 들러보고 영감을 받아왔고, 원더지는 이번에 동화책 작업하고, 콩도 여성 코워킹 스페이스를 둘러볼 예정이라고 알고 있어요. 각자의 키워드가 디모스와의 교집합이 크든 작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정리된 언어로, 시간을 할애해서 담아낼 수 있는 자리?
집사 '담아낸다'는 건 무슨 뜻이예요?
썬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예요. 근황토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나머지는 운영하는 데 시간을 쓰는 지금의 방식이 디모스답고 너무 좋아요. 지금의 구조에다가 최근에 어딘가 다녀온 사람에게 예를 들면 30분 정도를 주자고 정하는 식으로 그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시간을 정해보면 어떨까 해요.
집사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썬 평소에 자기 경험을 정리해 둬서 그 내용이 언어화된 분들이 있는 반면에, 방금 막 다녀왔거나 정리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분들의 이야기보따리도 있었을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발화 기회가 적은? 그런 분들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계기를 주면 좋겠어요.
집사 그게 왜 좋아요?
썬 글쎄요. (잠시 생각) 디모스는 열두 명이 평등하게 유기적으로 각자 역할을 찾아 가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 부분이 잘 이어지려면 골고루 자기 이야기를 하는 기회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말하는 사람들은 소속감을 더 느끼고, 듣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감을 더 인지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을 사랑하는 것, 소속감을 느끼는 것, 상대방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모두 다 중요한 일이라는 데에는 나도 마음깊이 동의했다. 하지만 썬이라는 한 사람의 바람이 더 궁금했다. 나는 "그 생각의 근거는 무엇인가?"에서 "그것이 당신에게 왜 좋은가?"로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꿔 보았다.
집사 경험을 나누는 건 기쁜 일이라고, 저도 느껴요. 그렇지만 어떤 지점이 나를 기쁘게 하는 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좋은 건지, 아니면 구성원들이 이야기를 고루 나누는 상황이 좋은 건지 다르잖아요.
썬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례를 더 듣고 싶은 쪽인 것 같아요. 지난 모임에서 행크는 1년 동안 페미니즘과 관련된 자신의 변화를 말하기도 했고, 멤버들도 디모스 투자를 해서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느끼면서 변화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꼭 디모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도 듣고 싶어요. 자기 생활의 이야기를 한다던지…
집사 저처럼 일대일 만남을 갖는 것도 방법이겠는데요?
썬 듣고 보니 일대일보단 집사가 정리해서 공유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집사 글을 보는 것 자체가 좋기도 하고.
집사 스스로 마당발이시라고 부르신만큼, 디모스 이외에도 썬이 참여하는 여러 커뮤니티나 모임이 있을텐데, 썬이 디모스에서만 느끼는 무언가가 있나요?
썬 최근에 제가 사는 디웰하우스에서 위민스 써클이라는 모임이 생겼어요. 인자하고 아우라 좋은 명상가 언니가 이 모임을 하자고 제안했거든요. 그라운드룰이 이래요. '재밌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고, 자기다운 모습으로 솔직한 모임이 되자.' 그걸 정하면서 나에게는 디모스가 그렇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사 가족이나 오랜 친구 같은?
썬 글쎄, 가족이나 고향 친구와도 모든 걸 언제나 솔직하게 이야기하긴 어려워요. 예를 들면 결혼하고 출산을 앞둔 가까운 친구는 나와 사는 삶의 영역이 너무 달라졌어요. 상황이 다르다보니 모든 이야기를 쉽게 하긴 어렵죠. 물론 그 친구와 편안한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렇지만 디모스는 좀 독특해요.
집사 어떤 점에서 독특하죠?
썬 나이가 들수록 점점 여러 겹의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아요. 디모스에서 가면을 안 쓴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디모스에서는 그 가면을 많이 벗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예요.
집사 그 느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썬 안전하다는 느낌? 판단당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 말하자면 가면 쓰고 사는 것이 힘든데 디모스에서는 괜찮은 거예요. 인스타에 올리려다가 지워버리는 거, 순간순간 떠오르는 찌질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할 수 있어요. 혼자서는 에버노트에 아무리 일기를 써 놔도 해소되지 않는 부분인데...
집사 ...에버노트는 업무용 툴 아닌가요?
썬 ㅋㅋㅋ 일기장으로도 쓰고 있어요. 일기에서도 해소되지 않은 이야기를 디모스에서는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래서 디모스에서는 일이 추진되지 않아도 괜찮은 거죠. 근황토크에 시간을 다 써도 괜찮고.
집사 그럼 마지막으로 지난 1년 동안 진행되온 소셜 투자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요. 근황토크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으로 소셜 투자를 계속 해왔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썬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거나,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는 생각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내 돈처럼 쓰고 싶다는 이야기도 아니구요. 돈을 낸 이후로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하지만, 계모임 형식을 통해서 우리가 관계의 매듭을 이어간다는 점이 좋달까? 그 돈으로 우리끼리 여행가서 탕진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썬은 저녁에 미네르바 대학 등록을 했다고 한다.
해보는 모임 디모스(demos)는 2017년 초부터 사회적 의미를 가진 프로젝트에 투자하거나 그러한 일을 하는 개인/단체를 후원하는 계모임을 해보고 있습니다. 디모스의 취지와 활동은 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