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지 Oct 21. 2016

먼 훗날의 사람들에게

그림책 편지 #9 2016년 10월 28일



요즘, '먼 훗날의 사람들에게'라는 주제로 무언가를 하고 있어요. 먼 훗날의 사람들, 그러니까 앞으로 자라날 세대들부터 100년, 200년 후 이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말을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짧은 동영상도 만들어보자고 해서, 제 몫으로는 이렇게 촬영해봤어요. 책을 쓰고 만드는 사람인지라, 동영상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만들고 말았네요 :)



<살아 있어>를 가지고 동영상을 만들어봤어요!



100년, 200년 후의 세상이라니, 저는 사실 잘 짐작이 가지 않아요. 어떤 세상일까요? 먼 미래를 상상하는 것보다는 현실의 아픔을 되새기는 쪽이 더 쉬워서, 저는 그 아픔이 먼 훗날까지 전달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기를, 걱정 없이 자랄 수 있기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지금보다 더 사랑하는 세상이기를.



문득, 예전엔 무심히 봤던 그림책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졌어요. 어쩌면 과거의 사람들이 미래의 우리에게 하고픈 말이 그림책에 담겨 있는 건 아닐까, 혼자 상상해봤습니다.

오늘 그림책 편지는 그런 이야기예요.








곰인형 오토는 독일의 작은 공장에서 태어났습니다. 눈을 처음 뜨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오토를 번쩍 들어올리며 이렇게 말했지요.

"이 녀석 좀 보렴! 정말 사랑스럽지 않니?"

오토는 상자에 담겨 어디론가 갑니다. 바로 다비드의 집이었지요. 오토는 다비드의 생일 선물이었거든요.





오토는 다비드, 오스카와 함께 언제나 붙어다니며 놀았어요. 글씨 쓰는 법을 배우다가 그만 얼굴에 잉크가 묻기도 했고(표지 그림에 보면 오토 얼굴에 파란색 얼룩이 보이죠? 이때 생긴 거랍니다), 아래층 슈미트 할머니를 깜짝 놀라게 하는 장난도 쳤어요. 아무튼 셋은 아주 재미있게 지냈어요.


다비드가 옷에 노란 별표를 달기 전까지는요.



사람들은 다비드 가족을 '유태인'이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어요.(오토 눈에는 모두 똑같아 보였는데도 말이지요!) 결국 다비드 가족은 어딘가로 끌려가고 말았지요. 다비드는 오토를 오스카에게 맡겼어요. 둘은 날마다 다비드를 그리워했어요.

그리고 전쟁이 터졌습니다.



오토는 오스카와도 헤어지고 말았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의 모든 것이 다 무너져 있었고 총알이 휙휙 날아다녔습니다. 시커먼 군인이 다가와 오토를 봤어요. 군인이 오토를 집어 든 순간 총알이 날아와 오토와 군인을 쓰러뜨렸습니다.


오토는 알 수 없고, 안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로 오토가 사랑한 사람들은 흩어지고, 오토가 살아가던 세상은 망가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오토는 새 가족을 만났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낡아버린 오토는 골동품 가게로 가게 됩니다. 골동품 가게 주인 아저씨는 오토를 깨끗이 씻긴 다음 이렇게 말하지요.

"넌 정말 보기 드물게 멋진 녀석이로구나!"



그런데, 골동품 가게 진열장에 놓여 있던 오토를 누가 발견해 데려갔는지 아세요? 바로 오스카였어요! 그리고 오스카와 다비드, 오토는 어린 시절처럼 다시 뭉쳤어요. 다비드의 가족은 강제 수용소에서 죽었고, 오스카의 가족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 예전과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요.

오토는 이렇게 말해요.


이제는 누구도 우리를 헤어지게 할 수 없어요!

우리는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셋이 함께 살 수 있는 집도 구했답니다.

마침내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게 된 거예요. 평화롭고 평범하게 말이지요.

이젠 심심할 틈도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다시 표지로 돌아가봅니다.

오토의 얼굴에는 잉크 자국이 나 있고, 총알에 뚫린 가슴에는 얼기설기 꿰맨 흔적이 보여요.

솜이 빠지고 우글거려, 마치 노인의 얼굴처럼 주름이 졌습니다.

낡은 오토의 몸은 마치 시간의 기록,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의 기록 같습니다.

토미 웅거러는 낡은 오토를 표지로 내세워, 우리에게 그 기록을 잊지 말아달라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저 평화롭고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좋아하는 이들과 늙어서까지 오래오래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아마도 그러기 위해 오토가 오스카와 다비드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있는 것이겠죠?

세월이 흐르고 흐른 다음에도 오토의 얼굴에 난 잉크 자국을 잊지 않고 기억했던 오스카처럼, 제대로 잘 기억하고 중요한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잊어버린다면 오스카와 오토, 다비드는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까요.








이 책의 작가 루이스 무르셰츠는 1936년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토미 웅거러가 1931년 스트라스부스에서 태어났으니,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셈이에요). 이 책은 1972년에 출판되었어요. 40여 년 전, 작가는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 두더지의 이름은 그라보브스키예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넓은 들판에서 살지요. 이것 보세요! 굴을 얼마나 잘 파는지 몰라요. 두더지라면 다 그렇겠지만 :)




그라보브스키는 낮에는 열심히 굴을 파고, 저녁이 되면 불이 환하게 켜진 도시를 보며 풀밭 위에 올라서 쉬었어요.

'아, 조용하고 아늑해서 참 좋다.' 하면서요.




그라보브스키가 사는 들판에는 커다란 농장이 있었어요. 농장 주인은 그라보브스키가 땅을 파헤쳐서 멋진 들판을 망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라보브스키가 만들어놓은 흙더미를 발로 쿵쿵 밟아버리곤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요. 낯선 사람들이 농장 주변 땅에 막대기를 마구 찔러넣기 시작했어요. '측량'이라는 것을 하려고요.


그리고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되시나요?




무시무시한 바퀴와 커다란 발톱 괴물이 그라보브스키의 들판을 몽땅 파헤치고 말았어요. 그라보브스키는 바퀴를 피해 겨우 땅 위로 나왔지만, 이제 커다란 발톱 괴물이 그라보브스키를 삼키려고 해요.



불쌍한 그라보브스키! (발톱 괴물에게 잡혀 흙더미 위로 떨어지는 작은 두더지가 보이세요? )





그라보브스키는 너무 무서워서 꼼짝 않고 숨어 있다가 조용해진 다음 밖으로 나왔어요. 그라보브스키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한 두 가지, 부드러운 흙과 싱싱한 풀뿐인데 다 사라지고 없었지요. 그라보브스키는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기로 했어요. 커다란 도로를 건너는 위험한 여행이었지요!





결국 그라보브스키는 새 보금자리를 찾았어요. 싱그러운 풀과 부드러운 흙이 있는 들판에 도착한 거예요.

그라보브스키는 얼른 굴을 파서 새 집을 만들었어요.

'조용하고 아늑해서 참 좋다.'

그리고 단잠에 빠져들었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요.

그런데요, 저 멀리 도시가 보입니다. 그라보브스키는 여기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을 읽은 뒤, 종종 그라보브스키가 생각이 났어요.

잘 살고 있을까? 하고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새로 찾은 들판에도 분명 커다란 바퀴와 발톱 괴물이 찾아왔을 테니까요.


그런데 실은 그라보브스키만 걱정할 일이 아니었어요. 저도 최근에 그라보브스키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으니까요. 이사를 해야 했고, 이사할 집은 찾지 못했고, 집이 너무 비싸다는 사실도 깨달았어요. 나에게 필요한 건 조용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평범한 작은 집이었을 뿐인데!

루이스 무르셰츠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요? 두더지를 계속 외면한다면 결국 우리 삶이 두더지의 삶과 같아질 거라는 것을. 두더지의 삶을 지키는 것이 우리 삶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게!








'먼 훗날의 사람들에게'라는 주제로 하는 그 일은 실은 한 편의 시에서 시작되었어요. 프랑스 시인 기유빅(Guillevic)의 13편의 소네트 중 한 편 <먼 훗날의 사람들에게>.

프랑스어 원문을 찾고 싶었는데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문장으로 간단히 소개합니다. 이런 내용이에요.



<먼 훗날의 사람들에게>


수많은 세월이 흘러, 평화로운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루하루의 삶이 시인들이 흘려놓은 시처럼 아름다운

찬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만이라도 우리의 인생을 기억해주기를

매일매일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거친 숨과 눈물 삼키는 삶이 있었음을

고통과 분노, 상처로 우리의 눈에 슬픔만이 가득했던 날들이 있었음을


조금만이라도 우리가 사랑한 인생을 기억해주기를

힘에 겨워도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중 가장 큰 기쁨은

그대들에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것이었음을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배추가 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