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이 낡아가듯 사람도 늙어간다
동아리방에는 낡은 기타가 한 대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선배들보다 먼저 동아리방에 있었다고 했다. 도장은 벗겨진지 이미 오래였고 여기저기 쓸려 나무의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선배들과 많은 부원에게 사랑을 받았다. 광택은 잃었지만 새 기타에서 찾을 수 없는 편안함과 그만의 좋은 소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졸업하고도 그 기타가 종종 생각났다. 지금은 어떨까? 잘 낡아가고 있을까? 여전히 좋은 소리를 들려주고 있을까? 누군가 관리해주고 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나에게까지 도달했다. 나는 어떨까? 나는 잘 늙어가고 있을까? 미래에도 좋은 사람일 수 있을까? 잘 관리하고 있을까?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꼭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니가 아직 어려서 그래. 내 나이가 돼봐라. 이제 늙어서 안돼. 나이 들면 다 이렇게 돼. 신기한 점은 연령대를 가리지않고 모두 이렇게 말한다는 점이다. 대학 선배부터 직장 선배, 그리고 동네 아저씨부터 옆집 할머니까지 말이다.
어떻게 다들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신기했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되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그런가 보다 싶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몸이 약해지고 머리도 굳어가고 짋어질 것이 많아지며 감정이 메말라가는 건가 보다. 나이 듦이란 그런 것인가보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한 살, 한 살을 먹어가고 사회에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책임질 것이 많아지니 금세 지치곤 했다. 체력은 떨어지고 생각의 속도는 마음같지 않고, 머릿속은 늘 걱정과 불안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반쯤은 핑계였다는 걸.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을 변명 삼아 스리슬쩍 넘어가는 삶의 노하우였다.
하지만 싫었다. 나이를, 늙음을 핑계대고 싶지 않았다. 나이 듦이 그저 퇴보만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경험이 쌓이고 그를 바탕으로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알게 된 만큼 더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분명히 더 나아지는 것들이 있다. 나이탓을 하던 그들이라고 몰랐을리가 없다.
낡은 기타가 생각났다. 잘 닦아주고 줄을 갈아주고 손질해주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하면서도 긴 시간 익은 나무의 좋은 소리를 들려주듯이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닳는 부분을 꾸준히 고쳐주고 잘 익어가도록 매만져주면 되지 않을까. 단순히 닳아만 가는 낡음이 아니라 가치를 더해가는 낡음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기타처럼 낡아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사물이 낡아가듯 사람도 늙어간다. 늙음은 또 다른 낡음이었다.
늙음은 피할 수 없지만 낡음에는 저항할 수 있다. 좋은 음식을 즐기고 꾸준히 운동함으로 몸의 노화에 저항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음으로 사고의 경직에 저항하고, 새로움을 접하고 솔직하게 느끼고 표현함으로 줄어드는 감정의 폭에 저항하려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다시 돌아와 깊은 연륜으로, 나다움의 가치로 쌓일거라고 믿는다.
저항의 기록이 짙어질수록 나이 듦은 나를 매만지는 시간, 나다움을 찾아가는 시간이 된다. 의미가 달라지면 더 이상 핑계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작았던 날을 그리워하고 커질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모든 것이 아름답게 낡아가는 과정이 될테니까.
그 낡은 기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