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답 없는 어떤 사연
크리스마스를 맞아 무척 오래간만에 교회 예배에 오프라인으로 참석했다. 함께 호흡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내게 주는 감동과 별개로, 성탄 행사에 참석한 한 명이 되어 있자니 오래 전부터 예배 시간이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공연기획자의 잡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일요일이면 교회를 가고 '예배'라는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숨쉬듯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동네 작은 교회를 다니며 흔치 않은 음악 전공자 학생이라는 이유로 일찌감치 또래 예배가 아니라 어른들의 예배에 차출되었다.
지금도 생생한 초등부 성가대 시간, 매주 찬양과 성탄 칸타타 연습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는데, 중학교 올라가며 나는 언제나 어른들의 예배시간에 어른 성가대 옆에 앉아 바이올린으로 찬송가를 연주했다. 감사한 일이면서도 이미 그 무렵부터 내게 주일예배는 하나의 행사였다.
아주 특별한 환경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주일예배는 몹시 비슷하다. 잔잔한 음악에 하나둘 모여들어 기도하다가 전도사님 한 분이 오프닝 멘트로 예배의 시작을 알리면, 짧은 기도, 다 같이 부르는 몇 개의 찬송(예외없이 익숙한 곡-신나는 곡-그리고 잔잔한 곡 순서로)을 이어간다.
대표로 누군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성가대가 준비한 찬양을 발표하고, 목사님이 교훈적인 말씀을 전하고, 이와 관련된 찬송을 하나 더 부른 후 헌금을 하거나 교회 소식을 알리는 시간이 따라온다. 간혹 성찬이나 세례 같은 특별 순서가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목사님이 두 손을 들어 축복기도를 하며 예배를 마무리한다.
바이올린 하는 아이로 착실하게 예배에 참석할 때만 해도 나는 헌금하는 시간에 어떤 찬송을 선택해야 시간에 딱 맞게 연주할 것인가에 집중해 있었다. 설교 시간은 나와 딱히 관련없는 강연과 다름 없었고 1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이 행사의 순서나 연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대학에 갓 입학해 다른 기독교 단체의 '찬양 집회'에 참석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예배를 행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클래식한 악기 클래식한 찬송가가 아니라 현대적인 기악과 편곡과 조명과 무대로, 말씀보다 음악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찬양 집회는 내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전형적인 교회 공간에서의 변화 자체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교회 밖에서는 같은 콘텐츠로 인간의 몰입을 최대치로 이끌어내기 위한 연출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름답고 짜릿했고, 행사의 총 연출가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젊은 영혼들이 그렇듯 나와 몇몇은 의기투합해서 대학부 활동의 작은 변화들을 시도했었다. 더구나 내가 음악을 전공했고 공연 기획의 익숙한 현장에서 왔다는 것은 오히려 손쉽게 예배에 대한 관점을 프로답게(?) 바꾸도록 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그 날도 치밀한 기승전결로 악곡을 배치하는 나에게 문득 한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기술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정말 진정한 예배야? 남들은 감동할지도 모르지만 너도 정말 온전하게 예배를 드리고 주님께 집중하니? 인도자가 주님이 아닌 연출에 몰두하면, 과연 예배 참여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걸까?
친구의 질문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그로부터 몇년 후 악기 연주를 그만두고 공연기획자로 진로를 바꾸었다. 백스테이지와 행사의 운영 축제 실무를 경험할수록 그 친구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예배 시간 내내 나를 붙잡고 있기 일쑤였다.
놀랍게 발전해가는 행사의 기술들과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 주일예배의 간극 사이에서 나는 쓸데없이 혼자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맞을까? 왜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을까? 내 직업적 시선을 예배에 적용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걸까?
비슷한 경험이 결혼식 때 있었다. 내게 결혼식은 일생의 아름다운 약속이라기 보다 양가의 손님들을 모시는 중요한 행사였다. 나는 신부였지만 행사의 총괄 기획자였다. 단상에서 주례사를 들으며 내가 지정한 꽃의 비율이 맞는가 생각했고, 2부 오프닝 음악이 나올 때 음원을 회수할 담당자를 고민했다.
이 때는 누구도 나에게 '네가 신부라면 ㅇㅇㅇ 해야한다' 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진행에 신경쓴다고 해서 내가 신부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 물론 누군가 깔끔하게 운영하는 결혼식 행사에 주인공으로 참여하여 온전히 신부 역할만 하는 입장과 내 상태가 사뭇 달랐던 것은 맞다.
주일예배에 대해서는 그래서는 안되는 것일까? 매끄럽지 않은 진행도 은혜와 사랑으로 관대해야 할까? 왜 교회 내에서의 갈등은 그토록 곪게 되나? 현실의 프로들이 왜 교회만 가면 엉기적거리나? ......라고, 실로 오래간만에 2층 예배석에 앉아 단상 무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침 진행 중인 영아부 아이들의 성탄 찬양은 엄마들의 율동이었고 (왜 아빠들은 없을까) 유치부 유년부 아이들의 선생님들도 어지간한 고생이 눈에 보였다. 오로지 프로다운 태도로 성탄 예배에 임하는 분들, 그렇다면 저 순간은 예배가 아닌 걸까? 굳이 구분해야 하나?
나는 아직도 오래 전 친구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그 사실이 괴로웠고 정답을 찾고 싶었는데 이제와 들여다보니 여전히 내게 뿌리깊게 남은 이분법적 교육의 영향이구나 싶었다. 속세의 직업과 성공이냐 주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냐, 택일해라.
삼십대의 어느 날, 견고하게 세워져 있는 내 고정관념의 벽을 각성한 이후 이를 깨보려고 무지하게 노력하고 있지만... 올해 성탄 예배에서의 하염없는 생각은 아직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흔적이 아닌가 싶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는 기록, 새해에는 더 넘어서도록 애써야겠다는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