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예술 안에 살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제법 행복하긴 했었다. 그 안에서 최선의 고군분투를 하고, 나름 인생의 희노애락을 모두 경험하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겪었다. 지금도 그 당시 만났던 캐릭터 중 바깥 세상에서는 여지껏 마주치지 못한 캐릭터들이 있기도 하다. 온 우주의 범위를 어떤 경계로 한정짓고는 그 안에서 어떻게 내 자리를 잡아야 하는가 고민했다.
지금 생각하면 작은 우주였다. 그 너머를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애초에 그 너머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에게는 좁고 깊은 시선과 얕고 넓은 시야가 있고, 나는 좁고 깊은 시선의 탁월함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조차도 나의 이분법적 사고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우주 밖에는 좁고 얕고 시원한 샘물을 아주 여러 개 가진 사람도 있었고 폭넓고 바다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도 존재했다. 좁고 치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하고 안전했던 우주를 벗어나자, 내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할 시간이 비로소 주어졌다. 나는 어떤 흐름을 가진 사람일까? 한계를 넘어보지 않으면 내가 넘을 수 있는지 아닌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예술 안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 미래는 정해진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안정적이면서도 때로는 절망적이었다. 그 확고한 미래의 지도가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모두가 가는 길을 따라 당연히 발걸음을 옮겼고, 나보다 잘 넘는 사람을 보며 자괴감을, 나보다 잘 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사실은 모두가 달라야 하는 그 세계에서 모두 당연하다는 듯 한줄로 걷고 있었다.
(우리나라만 그럴지도 모른다... 꼭 예체능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너는 나중에 어떤 모습이고 싶니?" 만약 내가 이런 질문을 예중 혹은 예고를 다니며 열심히 전공하는 학생에게 건넸다고 상상해 본다. 그럼 어렵지 않게 대화 내용이 떠오르는 것이다.
저는 일단 인서울 음대 진학을 하고 싶고요 (대개 지망하는 학교나 사사하고 싶은 교수님이 정해져 있다) 학교 다니면서 레슨 열심히 하거나 세션 같은 걸로 좀 다양한 작업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사실 저는 실내악이 재미있긴 한데 실내악 팀이 연주로 돈을 버는 건 어렵잖아요. 졸업을 하면 아무래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오케스트라 단원 시험을 보거나 학생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으면 개인레슨과 강사 준비를 하겠죠? 독주회나 연주 경력도 필요한데 유학을 먼저 다녀오는 게 좋을지 고민은 좀 할 것 같아요. 요즘은 국내에서 자리잡는 경우도 많고 사실 유학은 어느 정도 형편이 받쳐줘야 하고. 영어 공부를 하려면 중간에 휴학을 해야되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어릴 때는 솔리스트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는데 지금 선배들 보면 오케스트라 종신단원만 되어도 먹고 사는 걱정은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이쯤까지 오면 그 다음이 흐려진다. 음악을 나의 업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음악으로 교감하기 위해? 내게 있는 어떤 감각을 음악을 통해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무언가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기 위해? 타인의 위로와 기쁨이 되기 위해 꼭 음악가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대중예술의 다양한 범위도 있고 더 직접적인 자원봉사자도 될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첼리스트여야 할까? 아이는 동공지진이다. 십여 년 매일 연습실을 오가면서도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한편, 대학에서 예술경영으로 방학마다 축제 인턴을 하고 있는 학생을 붙잡고 물어볼 수도 있다. "너는 어떤 커리어 비전을 가지고 있니?" 실제로 나는 이 질문을 이제 갓 1학년 입학한 몇십 명의 학생들에게 한명씩 물어봤다.
저는 예술을 정말 사랑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이 길을 선택했어요. 아니 사실은 제가 방송반을 하고 워낙 뮤지컬에 관심이 많으니까 선생님께서 학과를 추천해 주셨어요. 재미있을 것 같고 다양한 분야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진학했고요. 그런데 일단 대학을 들어왔더니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축제와 공연장과 박물관이나 교육 현장을 전전하며 행사를 열고, 홍보를 하고, 콘텐츠를 만들고, 찾아가고, 이렇게 계속 반복하면 되는 걸까요? 그러다가 직장으로 연결될 수 있는 좋은 사수를 만나거나 공채, 수시모집 추천을 받아 일단 어디든 회사에 입사하면 되는 걸까요? 그러고 나서 요즘의 테크와 지금의 순수예술은 어떻게 연결시키면 되는 걸까요?
얼마 전에는 음대를 나와 공연기획사 일을 하다 지금은 온라인 전시 관련 프로젝트에 계신 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커리어의 방향을 어떻게 잡고 계세요?"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던 분이라 허심탄회하게 진로 이야기 좀 나누고 싶다 하셔서 티타임을 잡은 날이었다.
어찌 어찌해서 여기까지는 왔는데 말예요. 악기 하던 때는 까마득하고요. 지금 일도 정말 재미있기는 한데, 회사에도 큰 불만은 없는데, 솔직히 다음 스텝은 잘 모르겠어요. 시도해보고 싶은 일들이 있어요.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회사에서 새로운 시도를 저 혼자 해내기란 쉽지 않네요. 조직이 뭔가 도전적인 분위기가 아니기도 하고 익숙한 방식이 훨씬 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더구나 새로운 방법은 획기적일 수 있지만 (대박날 수 있지만) 망할 수도 있다는 리스크가 늘 있으니까요. 음악에서 미술로 넘어왔으니, 그리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왔으니 그래도 이만하면 정말 큰 진전이다 생각하긴 하는데. 그럼 이걸로 된 걸까? 여기서 언제까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누군가의 고민을 만날 때면 나는 스스로 지금 여기, 이상한 지점에 서 있는 나 자신에게도 꼭 한번씩 물어보곤 한다. 미래의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어디인걸까?
내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곳은 모든 것이 매일 새롭다. 3년에 한번은 커리어의 급류를 맞이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해마다, 분기마다, 작고 격렬한 새로운 지진과 풍파를 만난다. (아니 사실 지진과 풍파가 어떻게 '작고' 격렬할 수 있냐 이말이다)
대부분의 경험은 전문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최대한 읽어내고 관점을 세우고 차근 차근 이슈를 풀어나가는 내공, 즉 문제 해결력을 키운다. 다가오는 사건 사고는 항상 다른 모습을 띄고 있더라도 점점 덜 당황하고 더 정확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음악가이던 시절에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음악가 곁을 지키는 기획자가 되어서는 '예술가들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더 넓은 범위의 문제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틈새를 파고드는 수많은 노력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전지적 내 관점으로 회고해보면 어떤 순수한 것(그러니까 예술로 사람에게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을 전하는 역할일 때보다 누군가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역할일 때 내 삶이 더 가치있게 여겨지더라. 미루어 짐작하건대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그러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자꾸 의미 의미 찾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