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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Nov 19. 2023

2.5인분의 일상

길고 솔직한 하소연

지난 여름부터 금요일이면 일찌감치 업무를 끝내고 아이와 야외로 나가 저녁밥을 먹었다. 15-20분만 운전해도 드넓은 잔디밭이나 싱그러운 숲이 (바닷가나 호숫가 뷰는 덤) 도처에 널려 있어 매주 다른 곳에서 돗자리나 간이 의자를 펼쳐놓고 픽업해온 음식을 먹곤 했다. 후다닥 밥을 해치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신나게 공을 차고, 나는 천천히 맥주 한 캔 따면서 깜깜해질 때까지 하릴 없이 앉아 있다 돌아오는 거다. 진짜 주말인 토요일로 접어들기 전, 서울과의 동시 업무가 없는 유일한 평일 오후, 금요일 저녁은 한 주 동안 쌓인 노폐물을 모두 털어내는 시간이었다.


서울에서는 공연과 그림이었다면, 밴쿠버에서는 나무와 물과 숲과 하늘과 산


어느새 11월, 요즘은 오후 4시 반이면 해가 기울어진다. 아이가 3시 무렵 하교하는데 차에 올라타며 매일 서운한 목소리로 "벌써 해가 지고 있네"를 연발한다. 여름에는 밤 9시에 집에 들어오면서도 "이렇게 환한데 이렇게 늦었어?" 했다면 겨울이 다가올수록 "아직도 이 시간이야?" 하며 시계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낮이 끝없이 길 때는 저녁 식사 후 다시 놀이터로 뛰어 나가던 아이가 이제는 밥을 먹고 집 근처 실내 자전거 파크로 간다. (그렇다, 여기는 무려 건물 실내에 자전거와 스쿠터를 탈 수 있는 목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대륙이다)


그만큼 생기는 혼자의 시간. 산책을 할 수도 있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도, 쇼핑을 여유 있게 다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직접 선택하는 것도 아닌, 알고리즘이 띄워주는 영상들을 돌려보며 아주 수동적인 시간을 보낸다. 그조차도 지루해지면 갈 것도 아닌 주말 여행지를 검색하고 사지도 않을 사치품들을 아마존 장바구니에 담다가, 시간이 다 지난 걸 깨닫고 깜짝 놀라 아이를 데리러 가기 일쑤다. 특별한 계획이 없는 주말은 내내 이렇게 아무 열매 없이 흘러간다.


한동안은 그렇게 뭔가를 놔 버리는 내가 한심했다. 늘 새벽과 아침으로 잠을 쪼개 살면서 체력은 땜질하기 바쁜데 부족한 수면이라도 보충하던지 맑은 공기 마시며 걷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한국에서는 생전 없던 무기력한 얼룩들이 일상의 군데 군데 늘어갔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멘탈이 무너지거나 물리적으로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시도 때도 없이 "아이고 잠깐만 좀 쉬자" 하다가 눈 깜박할 사이 하루가 다 가버리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 - 알람은 알람이었다.


아이 일정, 집안일 일정, 회사 일정, 그리고 서울에 챙길 일들 - 조금 한가한 주간의 캘린더


여기 온 후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시간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씨름하는 날들이었다. 사실 캐나다행을 준비하며 당연히 두려움도 있었지만 도전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조금은 더 많았다. 아이가 많이 컸고, 원격이지만 힘이 되는 동료들도 있고, 여러모로 뒷받침해 주는 가족이 있고, 낯설지만 생판 모르지 않는 도시와 나라, 대단한 커리어를 꿈꾸거나 유명세를 바라지 않은지도 오래,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으리라 싶었다. 그리고 하루 하루, 일주일, 한달, 살아내며 계속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아직도 이렇게 정신이 없지...?


한국에서 성장한 제품을 들고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미니 특공대에 몸 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비자를 기다리는 남편을 서울에 두고 나 혼자 300일 넘게 아이의 시간 공백을 메꾸며 지내는 덕분일 수도 있었다. 일-가정 균형을 체크하기 위해 트래킹 도구도 활용해봤고, 너무 많은 우선순위를 쳐내려고 온갖 생산성 도구도 더해봤다. 찾기 어렵다는 '운전까지 해주는' 온콜 여사님도 구했고 (온콜 = 필요할 때 연락하는) 한국보다 두 배로 비싼 가사도우미, 식재료 배달, 외식 서비스 구독을 해가며 서울에서 하듯 '돈을 처발라 내 시간을 사는' 방법도 서슴치 않았다.


그런데도 도무지 삶의 여백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글을 쓰는 걸 정말 좋아한다. 평생 일기를 써왔고 조금만 틈이 나도 손으로 폰으로 뭔가를 끄적인다. 남들의 얘기를 듣고 내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적성검사를 하면 꼭 서비스업이나 사범대를 가라고 나왔고, 연주자이면서 선생님이었던 시간도 10년 가까이 된다. 사람의 마음에 관심이 많아 다들 버겁다는 1:1이 내게는 기쁨인 것을 주변 분들은 다 아신다. 읽는 것도 좋아한다. 바이올린 하나만 집중하던 시절에는 책을 잡으면 무조건 그 자리에서 끝을 냈다. 얼마 전까지 SNS 에 빠져 살던 것도, 온갖 구독형 콘텐츠를 끊지 못하던 것도, 종잇장 넘기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읽는 욕구를 채우고 싶어서였다.


그런 내가 빈 시간이 나타나도 쓰지도 말하지도 읽지도 않은 채 (개인 엔터테인먼트의 가장 후순위로 두고 살던) 영상 시청이나 인터넷 검색에 쏟아버리고 있다니. 그러면서 여전히 글을 쓸 시간도 없고, 말을 할 시간도 없고, 읽을 시간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니. 아니, 하고 싶은게 많은데 미뤄야 해서 힘들다며. 그럼 더더욱 일분 일초 빈틈없이 촘촘하게 부지런하게 살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달 반 전의 SNS 포스팅


사실은 얼마 전 평소 존경하던 분의 글 속에 '인생은 길고 커리어도 이어가기 나름이라 현명하게 잠시 속도를 줄이는 것도 좋다'는 내용을 읽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맥락은 이해하면서도 당사자로서 도저히 넘어가지지 않는 문장이었다.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싶은 분노가 순간 올라오는 걸 보며 깜짝 놀랐다, 아 내가 지금 힘들긴 하구나, 간신히 버티고 있구나, 그 어느 때보다.


자괴감이 슬금 슬금 기어 들어오는 중에 다행히 스스로 브레이크를 잡았다. (셀프 칭찬 모먼트) 너 같은 애가 틈만 나면 주저앉는다니, 그건 정말 쉬고 싶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동네 언니의 말도 나를 붙잡아줬다. 결과를 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누군가 그들의 삶 한 쪽을 돌봐주고 있다는 얄미운 사실도 조금 더 인정했다. 그렇게 나의 고민은 다시, 초과된 용량을 어떻게 적정량으로 되돌리면서도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것인가 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알고 있다. 1인분의 엄마, 1인분의 직장인, 이것만으로도 이미 넘친다. 그래도 뭐 하나 놓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욕심 아니고 현실. 여기서 잠깐, '한동안은 각각 0.5인분의 결과물에 만족하라' 따위의 말은 당사자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 나는 예전에도 앞으로도 절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동료가 0.5인분의 동료를 자랑스러워 하고 어떤 가족이 0.5인분의 엄마를 원할까?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이를 표현해 본다면 '완전히 부서져 재조립된 모습이 이제부터의 나 자신임을 수용해야 한다' 정도. 혹시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따위를 이 상황에 덧붙이는 것도 절대 반사함.


며칠을 곰곰히 생각하며 한발짝 뒤로 물러나 일상을 살피는데, 지금보다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감정이 절로 몰려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변명부터 떠올랐지만 한편으로는 클라우디아 골딘의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서 말하는 문제 지적에 몹시 공감했다. 나는 잘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다. 다만 모든 것을 원하는 만큼 이뤄내기에 시간과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너무도 뻔하지만 어려운, 팀플레이 -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내게 더 많은 조력자와 팀이 필요한 거지.


어느 틈에 2023년의 끝이 코 앞이다. 카운트다운 70 이하로 내려가면서부터 새해의 나를 위해 회사에 무엇을 제안할 것인가 계속 생각해봤다. 감사하게도 지금의 나를 둘러싼 환경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한편으로는 주어진 총량이 버거웠다. 달리고 싶은 길이 눈 앞에 보이는데도 어디 묶인 것처럼 도무지 속도를 낼 수 없어 답답했다. 결국 연봉 인상도, 유연 근무도, 거주지 이전도 아니라 추가 채용이구나. 나는 지난 주 이 얘기를 동료들과 리더와 공유했고, 나와 팀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는 새로운 멤버를 맞이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나는 1인분의 엄마와 1인분의 직장인에, 최선을 다해 0.5인분의 나 자신까지 더할 예정이다. 2.5인분의 합계가 무거운 듯 보이지만 ‘나 자신 0.5인분’은 나머지 2인분을 훨씬 잘 돌아가게 만들어줄 거라고 확신한다. 조직에서의 팀도 커질 것이고 가정에서의 팀원도 늘어날테니 (남편의 입국 시기가 거의 결정됨) 2024년은 올해보다 더 좋아질 것이 분명하다. 물론, 더 좋아진다는 것이 더 수월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안다고, 안다고.




이틀에 걸쳐 이 글을 쓰고, 저장만 해둔 채 오래간만에 아이와 같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몸이 움직여야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건 정말 진리인 듯. 실내 자전거 파크에 아이를 두고 책상 앞으로 돌아와 여기 저기 고쳐가며 이 글을 발행하고 다시 아이를 데리러 간다. 저녁밥 먹일 시간이라서.


오늘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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