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뜀과 자발적 쉼의 이상과 현실
'내 삶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이 말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 것인지, 한해 한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느끼고 있다. 나 역시 주도적으로 살고 있다 착각하면서 많은 외부 요소에 끌려다니다가 자신의 선택을 믿고 실행하며 책임지게 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몇 터닝포인트들이 나를 살렸고, 남은 내 인생을 살렸다. 그리고, 그 주도성을 늘 상기하게 하는 문화가 채널톡에 있었다.
채널톡에는 자발적 쉼과 자발적 뜀이라는 말이 있다. 더 일할지, 더 쉴지 스스로 결정하고 온전하게 자신의 워크로드를 관리하고 책임진다는 의미다.
내가 처음 합류했을 때에는 팀이 작고 코로나의 한복판이던 때였는데, 메신저로 업무 상태를 확인하고 스스로 본인의 부재와 출퇴근을 공유하며 자유롭게 연차 반차 반반차를 사용하는 분위기가 정말 인상적(충격적)이었다. 누군가는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일하고, 누군가는 해질 때부터 해뜰 때까지 일했다.
이후 조직이 커지고 다양한 환경 변화를 겪으며 지금은 어느 정도 시스템을 갖추었다. 플랫폼으로 연차를 카운트하고 팀별로 코어 타임을 두어 재택과 출근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체제를 운영 중이며 주말이나 휴가 중에도 메신저에 멘션은 편하게 하되 즉답을 기대하지 않는 비동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한다.
그 과정이 모두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팀은 늘 한 가지 목적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성숙하게 책임을 다하고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최선의 환경은 무엇인가.
이와 더불어 태초부터 물줄기처럼 흘러 내려오는 "자발적으로 뛰고 자발적으로 쉰다" 말이 늘 공존했다. 타운홀에서도 자주 듣고, 메신저에서도 자주 읽었다. 다들 죽어라 뛰는 것 같은 동료들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도, 한참 바쁠 때 누군가의 부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신기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다들 뛰면 나도 뛰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발적 쉼의 한계와 기준은 뭐지?
"자발적 뜀과 자발적 쉼" 얘기를 채널톡 밖 사람들에게 처음 얘기하면 대체로 3가지 반응이 나왔다.
1. 그럼 내가 쉬고 싶으면 한달도 그냥 쉴 수 있어? (전형적인 악용 시나리오, 프리 라이더)
2. 자발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는 비웃음 (뛰든 쉬든 어차피 탑다운 아니냐 하는 무기력증)
3. 진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해? (보기 좋은 형식 있으면 뭐해 아무도 안 쓰는데 하는 불신)
여기에 이 분들이 간과하는 2가지, 바로 내가 그토록 채널톡 일하는 문화를 사랑하는 2가지 배경이 있다.
(1) 구성원을 '자신의 상태를 잘 파악할 줄 알고 책임 있게 행동할 줄 아는' 성숙한 성인의 한명으로 기대한다는 것
(2) 좋은 일 뿐 아니라 안 좋은 일까지도 무엇이든 더 많이 공유할수록 나에게 더 좋은 것이 돌아온다는 것
아무도 하루종일 나를 체크하지 않아도 나는 충실하게 나의 할 일과 조금의 노력을 더해 기대보다 더 나은 성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믿음 - 이것은 나와 조직 간의 신뢰 뿐 아니라 동료 간의 신뢰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래야만 타인에게 생긴 문제를 바라볼 때 비난보다 돕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튀어나온다.
우리가 서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의 울타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고 해보자.
상대방이 어느 날 '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3시간 정도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했을 때 '무슨 꾀를 피우는 거지' 하는 의심이나 '저래서 제 때 나한테 넘겨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생기는 대신, 뭔지 모르는 그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피어오른다. 도울 일은 없냐고 자연스럽게 손길을 내밀게 되기도 하고, 모쪼록 수월하게 해결되어 동료가 다시 업무에 전적으로 몰두할 수 있게 되기를 '응원'하게 된다. 사정이 있는 동료는 고마운 마음으로 나가서 일을 잘 처리하면 되고 돌아와 집중해서 결과물을 만들면 된다. 혹여 변수가 생겼을 때는 이를 재빨리 상대에게 알려 여러가지 영향을 미칠 요소들을 미리 논의하고 기대치를 잘 조절하면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아주 아주 아주 두터운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그 신뢰는 누가 먼저 주어야 하는 걸까? 결국 시스템을 운영하는 '회사'이겠지. 열심히 좋은 인재를 찾아 합류시키고 나서 그들을 믿지 않으면 그거야 말로 비효율이다. 채널톡에서의 3년 반의 시간 동안 나는 회사가 먼저 사람을 의심하며 밀어내려 하는 걸 보지 못했다. (성과 측정이나 피드백과는 다른 얘기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며 악용하는 사람이 있으니 회사가 칼을 휘두를 수 밖에 없다고, 혹은 회사가 그토록 촘촘하게 압박하니 구성원은 자꾸 탈출할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옥신각신 한다는 것도 안다. 어쩌면 채널톡의 자발적 쉼, 그리고 자발적 뜀 원칙은 지나치게 사람의 선의에 기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된 거냐고 묻는다면... 그저 리더십의 성향이라고 할 수 밖에.
그래서 채널톡의 동료들은 자발적으로 뛰고 자발적으로 쉬는가? 그렇다. 채널톡의 높은 목표, 치열한 페이스, 끝없이 끓는 용광로같은 에너지를 '매력적' 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 스스로 달리고 스스로 숨 고르며 같이 나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채널톡 팀 안에 남아있는 동료들은 체력, 멘탈, 페이스의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한편, 강한 매력은 강한 혐오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떤 분들은 우리 팀 얘기만 나와도 고개를 절레절레 한다는 사실도 안다. 원하던 뜨거움이 아니라는 걸 빨리 깨달은 분들은 당연히 팀을 떠났다. 단지 뜀과 쉼 때문이 아니라 그 분들께는 다른 목표, 다른 페이스, 다른 에너지원이 더 잘 맞는 분들이셨을 거라 생각한다.
때론 조직의 기준이 몹시 특이하고 높은 것이 (괴로운 부분도 있겠지만) 한 팀으로 일하기에 좋다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누구도 나를 이 용광로로 떠밀어 넣지 않았다.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지만 내가 좋아서 내가 해보고 싶어 뛰어들었고 내 스스로 여기에서 버티고 도전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주도성이야말로 자발적 뜀뜀뜀뜀뜀뜀 쉼 정도를 반복하면서도 낄낄 웃으며 내일 다시 사무실에 나타나는 나와 동료들의 마음의 디딤돌이자 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