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우주, 나의 이야기 2
이 글은 다른 공저에서 퇴고본으로 개정 편집되어 발간됩니다.
40대 중반, 다시 백수가 되었다.
한국에서부터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일상의 대부분을 함께 했던 조직이었다. 그동안의 커리어에서 드물게 3년 이상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제품이었고 서로 노력과 애정을 다했던 팀과의 이별이었기에, 마치 장거리 연애를 하다가 얼굴도 못 보고 헤어진 연인마냥 허탈한 마음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이 소식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 세 식구 캐나다로 이사하는 큰 그림에 내 월급과 직장은 흔들림 없는 근간이었다. 아무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 수가 없던 쪽이 맞다. 나는 마치 출근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공유 오피스로 나갔다. 아이도 남편도 나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를 알게 된 지인이 따끔한 소리를 했다. “며칠도 아니고 어떻게 몇 달을 감추려고 해? 지금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까운 사람들의 서포트야. 너 전혀 괜찮지 않아. 그리고 그렇게 오래 숨긴 사실을 나중에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날 마침 이른 저녁부터 비가 주룩 주룩 쏟아졌고, 인수인계를 위해 늦게까지 일한 나를 남편이 데리러 오게 되었다. 뭐라 설명할지 몰라 아주 간단하게 이달 말로 퇴사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잠시 말이 없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차라리 이렇게 정리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이참에 한 숨 돌리고 여기 현지에서 찾아봐.”
남편의 대답을 듣는 그 순간은 진심으로 안도했던 것 같다. 지인의 말대로 역시 가장 가까운 사람의 감정적 지지가 중요했구나.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또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컴퓨터를 켤 때마다 조급함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월급이 완전히 끊기기 전에 다음 기회를 연결하고 싶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채용 공고를 검색하고 이력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한국이면 모를까, 캐나다에서 단 한 번도 채용의 과정을 겪어본 적 없는 내가 현지 사람들도 쩔쩔 매는 지금의 취업 시장에서 짧은 시간에 갑자기 자리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왠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과 혼자의 노력은 차가운 거절 메일들로 되돌아와 쌓여갔다. 아, 이거 아니네. 문득 정신이 들었을 즈음에는 이미 한 달이 넘게 지나 있었다.
다행히 스물의 나, 서른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괜찮아요, 나 진짜 괜찮아요’ 를 연발하며 살았던 어린 나에 비해, 지금의 나는 최소한 위기 상태를 제법 빠르게 감지할 줄은 알게 된 것이다. 알아차릴 뿐 아니라 불안의 원인을 제거해서 삶의 가시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도 함께 일하던 팀에서 수없이 반복해 배웠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결국 제한적인 자원을 어디 사용하고 무슨 효율을 높이는가 하는 의사 결정이 전부다. 나는 길게 망설이지 않고 돈을 들여 전문가를 찾았다. 이력서도 고치고 인터뷰도 여기 방식에 맞게 준비했다. 생전 눈 돌리지 않았던 한인 커뮤니티도 찾아다녔다. 나와는 다른 입장에 있는 분들이 훨씬 많았지만 괜찮았다. 지푸라기라도 손을 뻗어볼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백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지금 어디서 일해?” 하는 질문에 쉽고 간단하게 답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 고마움이 너무 커서, 나도 잊지 않고 난관에 처한 누군가를 만나면 꼭 먼저 도와주리라 여러 번 다짐했다.
나는 여전히 구직 중이다. 우리 집의 유일한 수입이던 내 월급은 중단된지 3개월이 지났고, 더는 소진하면 안되는 마지막 비상금을 꺼내 태우며 또 한 달을 살아내고 있다. 미래를 생각하면 캄캄하고 아득하다가도 당장의 오늘을 들여다보면 지금 해야만 하는 일들, 보살펴야 하는 어린이와 현지 적응에 어지러운 남편 덕분에 마음을 다잡는다.
돌이켜보면 내게 가장 좋은 것은 항상 가장 늦게 왔다.
악몽 같던 조직 생활들을 하나씩 뒤로 하고 결국 제일 즐거웠던 직장이 마지막 회사인 것도, 아이가 어릴 때 깊은 사랑으로 돌봐주었던 이모님을 백여 명 넘는 면접자 중 포기 직전 가장 마지막에 만난 것도, 막막한 유학길 유일하게 열렸던 합격 소식이 제일 늦게 도착한 것도, 오래 하던 바이올린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 연주에서야 비로소 진짜 자유를 맛보게 된 것도, 늘 그랬다. 그 어떤 기쁨도 처음에 오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내게 다가올 것이 내게는 가장 좋은 것이 될 것이었다.
늦은 길을 가고 있다. 오래 하던 음악을 두고 느즈막히 진로를 바꾸었고, 그보다 더 늦게 완전히 다른 산업으로 건너왔다. 누구 말대로 제발 잘하는 것 좀 계속 했다면 지금보다 수월하게 달리고 있었을까. 걸음을 더 서둘러 내딛고 누군가를 앞질렀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곳에 도착해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이번의 정답도 꽤나 늦게 찾아올 거다. 기다림이 길어지는 만큼 애가 타겠지만, 언제나처럼 결국에는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안다. 큰 기대 하지 않으려고 나 자신을 틀어쥐고 있는데, 머리로는 ‘걱정해야 할 때’ 라고 생각은 하는데, 실은 모험과 신비의 나라 입구에 서 있는 아이처럼 설렘이 더 크다. 아직도 나는 철이 덜 들었나보다.
지난 글의 마지막에 스스로 이런 질문을 남기며 마무리 했었다. “60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서 안타깝지 않으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을까.” 어쩌면 내가 해야 하는 노력은 그저 지금을 온전히 잘 통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 걸린 여정들이 다 이유가 있듯이, 하나 하나 쌓여 사십 몇 살의 내가 되었듯이, 60살의 나는 지금을 돌아보며 또 다시 글 하나 쓸 것 같다. ‘그 때는 미처 몰랐지만 정말 중요한 과도기였어.’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