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과 조금 비슷한 80년생 마음씨의 기억 조각들
매일 매일 닫히는 문을 마주했다. 눈 앞에서 늘 문은 닫혔다. 나는 남았고, 아니 나와 아이는 집 안에 남았고, 그는 집 밖으로 나갔다. 그는 거의 매일 회사를 나갔고 손님들을 만났고 영업과 접대로 현장을 돌았다. 나는 거의 매일 아이를 먹이고 아이를 재우고 아이를 씻기며 가끔 동네 외출을 했다. 그는 가끔 친구들을 만나 저녁식사를 하고 술을 한잔 하기도 했으며 늦은 나이에도 불금을 즐기는 지인들과 생일파티도 하고 주말이면 축구를 했다. 나는 가끔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와 배달 음식을 같이 시켜먹고 맥주 한 캔을 나누어 마시기도 했으며 답답할 때는 혼자 이유식과 젖병과 기저귀가 가득 든 가방을 차에 싣고 아이를 카시트에 태운 채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예고편을 볼 때부터 나를 흔든 장면은 김지영과 엄마가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장면도, 남편과 그녀가 두 손을 꼭 잡고 울던 순간도 아니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그 순간, 매일 아침 남편은 출근하고 아내는 집에 남는 장면들이었다. 웃으며 배웅하고, 눈 앞에서 문이 탁 닫힐 때의 그 감정, 그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은 아마 죽을 때 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지만 죽을 때까지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 감정은 어떤 날은 마음에 재를 확 뿌리고 어떤 날은 찬물을 끼얹었다. 어떤 날은 몰래 불을 지피기도 했고 어떤 날은 나를 동굴에 가두어 꽁꽁 얼려버리기도 했다.
물론, 언제나 제기되는 반론은 '너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지 않았냐' 라는 것이지만. 그렇다, 남편도 다른 가족도 (소위 말하는) 무비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어떤 인력도 없는 상황에 모든 것을 내가 혼자 선택하고 판단하고 진행하고 해결해야 할 때 '비용'을 들여서라도 나의 손발 노릇을 해주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셨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인정한다. 이 사회에서는 그조차도 옵션으로 갖지 못한 채 모든 걸 홀로 이고 지고 엉금엉금 걸어가는 수많은 엄마들이 존재하니까.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아 양육과 가사를 '남의 손'에 맡기는 일을 흔쾌히 허락하는 남편을 만났고, 살림과 육아를 깊게 간섭하지 않는 어른들을 가족으로 두었으며, 도우미 아주머니의 월급으로 그대로 갖다드릴 지언정 그보다 부족하지는 않은 월급을 받을만한 직장을 근근히 연명하였다. 주변에서 대부분 '그렇게 악착같이 해서 뭐해' 라는 말보다는 '어려울텐데 애쓴다' 라고 격려해 주었다. 아무도 회사에 있는 나를 대신해서 아주머니가 없는 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주는 수고를 해주지는 않았지만, 한밤중에 급성 후두염으로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아기를 안고 혼자 운전하거나 카시트도 없는 택시를 부르는 대신 119를 통해 구급차를 타라는 팁을 알려준 약사 출신 또래 아이 엄마 친구는 있었다. 퇴사한 후에는 미혼 친구들이 집을 자주 찾아주었고, 차가 있고 운전을 할 줄 아는 덕분에 혼자서 아이 기저귀 가방을 가득 싣고도 여기 저기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쳇바퀴처럼 반복을 멈추지 않는 일상이 팽팽팽 돌다가 잠깐 느슨해졌을 때, 밝은 얼굴로 운동 가방을 챙겨 나가던 남편의 뒷모습과 닫힌 현관문 앞에서 망연자실하던 나의 감정은 여전히 뭉친 근육처럼 마음 여기저기 남아있다. 퇴사하고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나의 월급 덕분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그만두신 후, 그것은 매일 아침 마주하는 절벽같은 순간이 되었다. 그 감정은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도 풀리지 않을 것 같지만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도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순간도 당사자일 필요가 없었고 당사자이기 위해 고민할 여지조차 없었던, (나의 오랜 표현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사람들은 평생동안 이해할 노력조차 필요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사람이라, 그 모든 순간을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떠올리며 툭툭 털어내기는 불가능했다. 분노가 솟구치는 모든 순간에 '그래도 너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해야지' 따위의 훈계가 통할 수 없었다.
김지영이 노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던 순간, 세탁기 앞에서 의자에 기대던 순간, 환청인듯 아닌듯 '엄마' 부르는 소리가 반드시 따라온다. 내게는 사유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분이라도 남는 시간은 동쪽부터 서쪽까지 모두 '매니지'하기 위해 쏟아야 했다. 그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주문처럼 그건 '아이와 함께' 보내야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원해서 한 선택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분량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문이 닫히는 순간, 문이 열리는 순간, 모두 심장이 덜컹 주저앉는다. 아주 빠르게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머지 어느 하나를 콕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그 단절의 절망과 절박함은 내 온 몸의 세포 어딘가에 새겨져 나도 모르게 반응한다. 그 때마다 슬프고, 괴롭고, 아프다. 그리고 그 때마다 조금씩 더 다짐하게 되는 것 같다. 나보다 어린 여성들은 이런 순간을 덜 맞이했으면 좋겠다. 나의 아이의 여성 친구들은 이런 순간을 거의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공감이 어려울 정도로... 살아가는 환경이 조금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매일 고민하면서도 가끔 기운이 나는 것은, 그래도 이런 먼지같은 노력이 조금이라도 파장을 일으켜 20년 30년 50년 후의 여성들의 삶은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희망을 자꾸 갖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