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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다 선생님, 150회 이상 만나보니

자란다에서 일했던 기록

by 마음씨
매 주말마다 아이와 온 동네 놀이터와 운동장으로 놀러다니던 선생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스케줄 변경으로 앞으로 주말 방문이 어렵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역대 만나온 놀이 선생님들 중에서 아이가 손에 꼽게 좋아하기도 했고, 반 년 이상 성실하고 한결같이 아이와의 시간을 지켜준 믿음직스러운 선생님이었다. 순간 휘청... 했지만, 이런 일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얼마든지 변화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나도 아이도 충분히 자랐다. 선생님에게 '다음 방학에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눌 마지막 놀이시간 한 번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선생님도 아쉬움을 표하며 본인이 가능한 시간을 여러 날 알려주었고, 자란다에는 앞으로 선생님과 정기적으로 못 만나게 되었지만 다음 주 한 번의 방문은 따로 추가해 달라고 전달했다. 곧 일정 하루가 더 예약되었고, 아이는 다행히 선생님과 애틋한(내 기준) 마무리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육아도 살림도 아웃소싱이었다. 책 몇 권은 족히 나올만한 사연들로 숱한 만남과 숱한 헤어짐이 있어왔다. 그 이별들이 나만의 이별이 아니었기에, 아이 어릴 때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아프고 스트레스가 엄청났었다. 세월이 흐르며 우리 가족의 맷집이 좋아지는 만큼 아웃소싱 서비스도 많이 다양해지고 개선되었고, 어느 날부터 나는 자란다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은 우리의 일상에 자란다 선생님의 역할이 대략 40% 정도 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면 모르긴 몰라도 줄어들기는 커녕 60%를 넘어서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문득 과거 기록을 뒤져 그동안 아이와 만났던 선생님들을 찾아보았다. 인트로에 쓴 '반 년 이상 주말마다 만나온' 선생님과 헤어지게 된 시점에 아이와 자란다 선생님과의 시간은 14X회차를 지나고 있었다. 이 글을 완성하는 지금 시점에는 16X회차를 족히 넘기고 있지 않을까. (어제도 자란다 선생님이 우리집을 다녀가셨다!) 그 동안 아이는 30명이 넘는 선생님을 만났다. 한두 분을 제외하고는 대개 20대 초반의 대학생 선생님들이다. 아이가 좋아한 선생님도 있고 재미없어한 선생님도 있었다.


아이의 시간 중 나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시작된 자란다 선생님과의 오랜 협업이 내게 준 건 뜻밖에도 물리적 자유 뿐 아니라 아이의 성향과 관심사에 대한 객관적인 인사이트였다. 의도하였든 아니든 선생님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아이를 관찰하고 기록하여 내게 전해주었는데, 이는 내가 아이와의 관계를 담담하게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이의 시간을 채운다는 것에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아이가 '아기'이던 시절의 돌보미 이모님 세계에서 벗어나고 자란다 선생님들이 우리의 삶에 합류하게 되면서 나는 미안함이 많이 희석되는 걸 느꼈다.


아이가 어느 선생님과 어떤 공간에서 무슨 활동을 할지 구체적이고 확실한 계획은 대부분 내가 직접 세웠다. 아이 컨디션에 따라 '하고싶어 하는 놀이 해주세요' 라는 가이드조차 나의 결정이었다. 간혹 세세한 요청사항이 선생님의 적극성이나 의지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될 정도로 해야 할 일과 부탁사항을 장문의 메시지로 보내기도 했었다. 다행히 명확한 전달과 지시를 선생님들이 훨씬 더 선호한다는 걸 알고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었다. 어떻게 보면 직장이랑 똑같은 것 아닐까? 상사가 '일단 잘 만들어 와봐' 하면 막막하지만 가이드라인 디테일하게 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제일 처음 만난 선생님은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게는 또렷한, 반듯하고 차분한 인상을 가진 첫 자란다 선생님은 체육교육과 남자 선생님이었다. 간신히 6살이 된 아이가 낯선 선생님과 집에서 무얼 하면서 두 시간을 보낼까 싶었던 내 걱정을 우습게 만들면서, 선생님은 아이가 그토록 하고 싶어했지만 실패를 거듭하던 앞구르기를 이틀 만에 성공하도록 도와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선생님 오는 날'은 말도 별로 없는 아이가 벨소리만 듣고도 맨발로 뛰어나가는 날이 되었다. 독박육아의 굴레가 낳은 우울감으로 힘들던 내가 다시 저녁 길거리 풍경 속을 걷게 된 것도 이 덕분이었고, 협상의 용기를 불러 일으켜 남편과 환경과 타협안을 도출해내는 촉매제가 되었다. 선생님은 그저 귀여운 꼬마와 온 몸으로 놀아주는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큰 응원이 되는 귀한 순간들이었다. (선생님은 잘 모르셨겠지!).


외부에서 만나도 좋겠다는 생각을 현실로 증명해준 선생님은 지방에서 상경한 교대생이었다. 귀엽고 야무지고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그녀에게도 우리 아이가 자란다를 통해 만나는 첫 아이인 듯 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살아보려고 큰 맘 먹고 8주짜리 저녁 세미나를 신청했던 때였다. 처음 오는 선생님을 달랑 아이와 떼어놓고 나가면 안될 것 같아 첫 날은 강연장 앞에서 만났다. 큰 서점에서 세 시간을 놀으라고 들여보내놓고 불안한 마음에 쉬는 시간에 쫓아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세번째 만남 쯤에 이미 선생님과 아이를 집에 떨궈놓고 홀가분하게 외출했던 기억... 싹싹하고 씩씩하던 그 선생님은 내가 귀가할 때까지 아이와 책읽고 그림 그리고 역할놀이를 하며 알뜰하게 시간을 보내주었다. 8주간의 세미나가 끝났을 때 즈음에는 오히려 선생님과의 만남이 종료되는 게 못내 아쉬웠었다.


(c) 사진의 모든 저작권은 마음씨와 자란다에 있습니다.


아이가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내가 조금 더 세상을 향해 손짓하기 시작하면서 자란다 선생님들은 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날개(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퀵보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어떻게? 원하는 곳으로 필요한 시간만큼 와주시니까. 성수동에서 행사가 있으면 성수동 키즈카페를 검색해 아이와 선생님을 밀어넣었다. 광화문을 가야하면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아이와 선생님에게 전시회 표를 쥐어줬다. 사람들을 만나고 미팅을 하고 다시 사회와의 끈을 이어가는 동안 자란다 선생님들은 아이와 놀이터를 가고 책을 읽고 도서관을 가고 밥을 먹으며 나와는 '다른 형태로' 아이의 시간을 채워주고 경험의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자란다 선생님을 만나는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나는 나중에 많은 자란다 이용 가정이 선생님을 '오직 집으로만' 신청한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키즈카페, 운동장, 놀이터, 전시관, 박물관... 항상 따로 신용카드 하나를 준비해 선생님 손에 쥐어드리면, 교통과 식사, 간식을 해결하고 때론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문구점에서 놀잇감을 산 후에 영수증 한 장까지 허투루 흘리는 법 없이 착실하게 챙겨주셨다. 우리집을 처음 찾아올 때 엉뚱하게 길을 못 찾을지언정 아이를 데리고 이동하거나 준비하는 것에는 늦거나 헤매는 법이 없었다.


(c) 사진의 모든 저작권은 마음씨와 자란다에 있습니다.


자란다 선생님들은 내가 메꿀 수 없는 놀이와 상상과 탐구의 세계로 아이를 이끌어 함께 여행했다. 그 뿌듯한 시간을 위해 나는 최대한 나의 당부와 아이의 패턴을 자세히 전달하고자 하는 동시에, 무리한 기대를 절대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참 좋았던 것 하나는 선생님들이 나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스마트기기를 잘 다루는, 빠릿하고 시력 청력 좋고 기민한 청년들이라는 점이었다. 택시를 태워 보내도 덜 불안하고, 길을 찾거나 물건을 설명할 때에도 수월했다. 구체적인 지시는 정확한 실행으로 이어졌고, 무언가 못 찾을까봐 연락이 안 될까봐 빠른 대처가 안될까봐 걱정할 일이 잘 없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나는 더 안심하고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솔직히 아이의 안전이나 감정은 나보다 선생님들이 더 잘 돌볼 때가 많다.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보상과 더불어 온전히 한 아이만을 책임지도록 임무가 주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 많은 선생님들을 그 다양한 환경에서 만나는 동안 바시락거리는 아이가 다친 건 음식점 식탁 사이로 혼자 달려가다 넘어진 한 번 뿐이다. 그조차도 선생님이 자란다에 바로 연락해서 연고와 반창고로 조치하고 엄마인 나에게 사진과 함께 금방 알려왔다. 고꾸라진 아이의 피나는 무릎을 보며 당황했을 선생님이 더 마음 쓰였던 건 나의 지나친 오지랖일까.


(c) 사진의 모든 저작권은 마음씨와 자란다에 있습니다.


아이가 엄마인 나를 따르는 것은 본능이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이 자신에게 선의를 갖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은 자란다 선생님의 역할이 7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부작용이 있다면 같은 '선생님'인데 단체생활에서의 선생님들은 좀 더 엄격하고 전체를 돌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오롯이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학교 선생님을 대할 때면 아이가 몹시 선생님의 '애정의 부재를 의심'한다고 해야 할까... 얘야,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단다.




모든 과정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딱 한 번 만나보고 몇 번이나 신청했지만 거리가 멀고 시간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을 하여 다시는 만나지 못한 선생님도 있다. 아이보다 내가 더 아쉬웠다.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선생님이 우리보다 5분 쯤 먼저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마주친 순간 방금 전 기다리며 피운 게 분명한 담배 냄새가 (야외인데도) 훅 쏟아졌다. 그 선생님에 대한 민원을 바로 자란다에 전달했고, 이미 진행하고 있던 선생님 유의사항에서 흡연과 음주, 화장품과 향수 이용에 대한 교육이 다섯 배 쯤 더 강화되었다.


큰 아이들만 다뤄봤던 선생님이 아이에게 '먼저 탄산음료를 권해서' 집에서 생전 먹어본 적도 없는 콜라를 아이가 식사 시간에 마시는 일도 생겼다. 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주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이 때는 자란다에 꽤 강하게 항의를 했었다. 관리 안된 선생님 뿐만 아니라 부모의 당부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던 자란다에도 많이 언짢았던 기억이다. 당연히 그 선생님은 이후 우리집을 방문할 수 없었다. 여러 번 나에게 사과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던 담당자는 이후 내 옆자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되고 말았다.


생각보다 아이와 재미있게 놀지 못한 선생님, 아이가 보여달란다고 스마트폰에서 유튜브를 보여준 선생님, 분명 옷과 약과 책을 다 챙겨두고 메모도 다 붙여 두었는데 놓치고 빠뜨리는 선생님도 물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실망하거나 이탈하지 않은 건, 같은 사고가 두 번 생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콜라 선생님이 유일했다) 사람이 하든 기계가 하든 추적 관리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고 이 경험은 입사 후 '어떻게' 관리를 더 섬세하게 하고 '어떻게' 더 나은 솔루션을 제시할 것인가에 대한 사업적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어째서 수많은 아웃소싱 서비스 중에 자란다에 정착하게 되었던가? 단발적인 필요에 따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던 나는, 내 신청 패턴과 선택의 기준, 아이의 성향까지 파악하고 있다가 아이가 (또는 내가) 선호할만한 선생님들을 추천해주는 자란다 서비스가 가장 편하고 안정감 있었다. 말하자면 요즘의 많은 서비스에 적용되는 '개인 맞춤형 큐레이션'인 것인데, 그 때만 해도 돌봄을 도와주는 인력 소개 서비스에서 그런 방향성을 가진 곳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입사하고 함께 일하게 되어서야 그 섬세함이 대표님의 자기 경험과 팀 멤버들의 '진심'이 빚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도 기여할 수 있게 되어 많이 기뻤다. 나와 아이의 일상이 달라진 것처럼 누군가의 일상도 더 좋아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란다 선생님을 만나는 패턴도 조금씩 바뀌었다. 단기방학이든 장기방학이든 몰아서 3일 4일 5일씩 신청하는 일이 늘었다. 학업을 따라가거나 과제를 해야할 일도 잦아져 학습이 포함된 시간으로 선생님을 찾았다. (이름하여 '한시간만 공부하고 나머지는 놀자') 간헐적으로 만날 때는 누가 오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며칠씩 연달아 시간을 보내려니 사람이 계속 바뀌면 매번 전달사항을 다시 전하는 일이 피곤해져서, 한 명의 선생님이 여러 날 길게 오시도록 접수하게 되었다.


착실하고 명랑한 여자 남자 선생님들을 고루 만났다. 그들은 모두 아이를 챙겨주었고, 약간은 어설펐지만 그만큼 성의를 다해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 자신의 뜻을 우선해서 살펴준다는 것. 각 선생님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아이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이끌어 주었고 아이는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차츰 익혀나갔다. 새로 만난 선생님이 좋다고 표현하는 아이의 방법은 지극히 단순했다. "오늘 온 선생님 언제 또 와?" 모든 걸 말해주는 그 짧은 문장 하나.


아기 때 시터 이모님의 인상보다 목소리에 따라서 좋아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반응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자란다 선생님도 비교적 유순한 인상과 음성을 가진 분으로 요청하는 나의 습관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다만 너무 차분한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리액션이 아쉬워 큰 아이들의 학업 도움이 더 잘 맞을 것 같다고 자란다에 피드백을 남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7세에서 8세 넘어오던 시기 쯤, 우연히 만나게 된 '아주 와일드한' 선생님 몇 명에게 아이가 열광하는 걸 보면서 깨달았다 - 내게 보이는 모습이 아이의 전부는 아니구나, 아기 때의 아이와 지금의 아이는 다를 수 있구나, 아이는 계속해서 자라고 있구나.


(c) 사진의 모든 저작권은 마음씨와 자란다에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시즌에도 아이는 내내 자란다 선생님들을 만났다. 모두가 위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아이의 안전도 철저하게 챙기는 모습이 많이 감사했다. 사실 우리가 선생님들을 믿는 만큼 그들도 우리를 믿지 않으면 참 어려운 일이다.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방문해서 어떤 아이를 만나게 될지 상상만 하면서 벨을 눌러야 하는 자체가 갓 성인이 된 20대 사회 초년생들에게 무척 긴장되는 순간이지 않을까? 그 과정을 뚫고(?) 아이의 형 누나가 되어주러 우리집까지 와 준 선생님들에게 대부분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한글 수업으로 진득하게 맞춤법을 잡아주는 선생님도, 역할놀이로 서투른 아이의 마음 표현을 도와주는 선생님도, 함께 운동장 나가고 자전거 타고 오더니 브레이크가 이상한 것 같다고 집에서 공구를 들고 온 선생님도,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어찌나 정성스럽고 열심히 숙제를 도와 주었는지 그 이후로 영어 숙제는 항상 그 선생님과 해야 한다고 아이가 찾는 선생님도, 모두 고맙다. 완전하고 완벽하고 노련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진심어린 성의 덕분에 늘 감동해 버린다, 아이를 대하는 표정에서, 내게 설명하는 말투에서, 방문일지에서, 귀가길에 남겨준 문자메시지에서, 저절로 배어나오는 목소리와 행동에서.




언제쯤 자란다 이용 기록이 200회를 넘어설까? 그 때에는 자란다도 아이도 더 크고 있겠지? 아쉬운 이별도 하고, 그런가 하면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선생님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한번 만나고 마는 선생님도, 놀자고 만났는데 공부하는 게 더 나았을 뻔한 선생님도, 공부하자고 만났는데 노는 게 더 나았을 선생님도 계속 있을 것이다. 십여 년 이상 육아와 가사를 아웃소싱해 온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제대로 시간을 보내려면 상세한 지시는 기본, 부모의 기대치 접어두기는 필수이다. 차곡 차곡 쌓이는 시간만큼 아이는 스스로 관계를 시작하고 매듭짓고 이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냥 동네에 풀어놓아도 알아서 사회를 익혀가던 우리 부모 세대와 달리 우리 아이들은 다른 형태로 세상을 배워나갈 수 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운이 좋게도, 우리 아이는 자란다를 만났다. 자란다 선생님들 덕분에 에미보다 폭넓은 사람으로 자랄 것이다. 스무 살 청년이 된 아이가 자신의 유년기를 추억하며 자란다 선생님으로 지원하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잘 키워야지, 아이도, 서비스도, 그래서 더 많은 부모와 아이들과 청년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런 마음이다.


(c) 사진의 모든 저작권은 마음씨와 자란다에 있습니다.


늦은 밤이 새도록 늘어놓는 하염없는 옛날 이야기, 이제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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