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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Apr 07. 2020

위로가 필요한 날

N번방, 그리고 아들.

사람을 대하는 일이 유난히 어려운 요 며칠이다. 이미 알고 있었고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N번방의 유력한 용의자가 잡히고 수사망이 촘촘하게 관련자들을 검거하고 있다는 기사에, 그 동안 쌓인 불안과 분노의 마음벽 한 쪽이 깨지면서 주르르 흘러나간다. 그래봤자 지금의 내가 목소리 높일 수 있는 곳은 SNS가 전부였기에 내가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과, 뜻을 같이하는 많은 분들의 의견을 힘껏 공유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일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대화하기 망설여지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같이 사는 성인 남성이다. 그는 평범한(이라 쓰고 지독한 이라 읽는다) 70년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라 대한민국 사회에 완전히 적응한 사람이다. 어쩌다 우연히 나를 만나 결혼까지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그와 나는 각자의 고유한 성향, 성장 과정을 통해 배운 것, 사회에서 부딪힌 사건사고와 현재의 입장도 너무나 다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나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나는 죽을 때까지 그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할 것임이 확실하다. 


이 간극을 하루이틀 느낀 것이 아니기에 나는 얼만큼은 내려놓고 얼만큼은 방어하며 매일을 살아간다. 나 하나의 삶이었다면 조금 더 무모하고 용감하게 선택할 수도 있으련만, 내게는 아이가 있고 그 아이는 안타깝게도 아빠보다 엄마인 나를 조금 더 닮았다. 매 순간 아이가 입는 상처가 내게도 남고, 아이의 긴장이 내게도 파장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내가 보호막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어서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토닥임을 아이의 인생에 구석 구석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하루의 마무리를 '그래도 아들을 낳아야'로 매듭짓게 될 때는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균형의 끈을 놓치고 불쑥 나의 본심이 튀어나오곤 한다. '19세기같은 발언'이라는 나의 말을 '인간의 본능'으로 맞받아치는 그 앞에서 나는 웃고 말았다. 


한 때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노력하면 달라질거라 생각하고 충돌하며 조율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나는 더 이상 없다. 그저, 시대가 수용할 수 없는 굳은 가치를 여전히 존중하고 사는, 변화하는 세상은 나와는 무관하다 믿고 사는 그와 함께해야 할 남은 인생 동안은 즐거운 일은 더 즐겁게 누리고 내상은 최대한 줄여 너무 큰 상처 없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애쓸 뿐이다. 아, 물론, 주말이라 집안의 어색한 화목함이 부각되었을 뿐, 사실 평일에도 줄곧 일어나는 긴장과 불편함이다. 아이가 성장해감에 따라 그리고 우리가 늙어감에 따라 갈등과 긴장의 겉모습은 달라지겠지, 하지만 본질적인 우리 사이의 깊고 좁고 날카로운 절벽을 지닌 계곡은 끝끝내 메꿔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회사에도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일이 굴러가도록 만들기 위해 불편한 균형을 유지하느라 기를 쓰기도 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평정심을 지키는 데' 소진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회사라서, 가정이라서 특별히 큰 일이고 특별히 어려운 일인 것도 아닌가보다. 그저,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부득이 법으로 묶여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그 장소가 가정이라고 해서 더 개인적으로 아파하고 일터라고 해서 더 감정적으로 상처받을 일은 아닌가보다. 울퉁불퉁한 삶이란 게 원래 그런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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