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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Apr 15. 2020

어떤 편애

아이 생일 그리고 나의 짧은 휴직 5일 전.

실은 이틀 전 쯤 쓰던 글인데, 그 날은 속이 풀리지 않아 글을 쓰다말고 한밤중에 친구를 만나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정신없는 하루를 지나 오늘이 되었다. 속이 상해 첫 줄을 냅다 쓰기 시작한 그 날, 무엇이 그토록 내 마음을 서운하게 하는가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리고 최근의 일들과 지난 일년 반 여를 돌이켜보며 나는 문득, 갑자기, 아주 익숙한 어떤 감정을 다시 만났다. 그건 바로 '편애'를 경험하는 순간의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내가 처음으로 이 감정을 느낀 것은 아마 (말도 안되게) 남동생에 대해서 였을텐데, 돌이켜 생각해도 우리 부모님은 정말 남녀차별 없이 우리를 키우셨다. 오히려 남동생이 '남자라는 이유로' 더 방치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생이 누리는 자유(a.k.a. 지멋대로 또는 고집)가 부러웠고, 그 모든 것을 '허용'해주는 부모님에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나는 성향상 알아서 기는 쪽이고 남동생은 성향상 제지해도 잘 안 듣는 쪽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다 커서 나도 애를 키워보니 우리 부모님이 남동생을 제압하기 위해 꽤나 노력을 하셨던 것 같은데 그냥 그게 잘 안 먹히는 애였던 것이다. 어린 내 눈에는 그런 건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지적하기 전에 알아서 맞추는 나와 지적을 아무리 해도 하고싶은 대로 하는 동생의 태도만 비교가 되었다. 속이 상했고 동생보다는 부모님이 미웠다. 밉다기 보다는 왜 A로 하지 않고 B로 하는가, 에 대한 끝없는 원망이나 분노가 일었다. 다 어른이 되고, 둘 다 아이를 낳아 키우고, 부모님 중 한 분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아주 나중에 그 오해를 조금 풀 수 있었다. 


그 상황과 감정을 또 만난 것은 오래된 내 '클래스'에서였다. 나의 '선생님'은 지구에서 TOP 몇에 들 정도로 남존여비 사상이 심한 분이셨고 (물론 당신은 극구 아니라고 하신다) 팀웍이나 태도 상관없이 경쟁에서의 결과가 좋은 쪽의 손을 무조건 들어주는 분이기도 하셨다. 십수 년의 세월을 그 공동체 안에서 보내는 동안 나는 이상했고, 납득할 수 없었고, 불편했고, 싫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분위기에 참묵하거나 외면하는 방법을 먼저 터득했다. 고작 열 몇 살이었던 교복 입은 아이는 그렇게 '언짢은' 감정을 숨기는 것을 시작으로 그 공동체에서 탈출하게 될 때까지 점점 더 감정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연습을 했었다. 에피소드를 예로 들자면 밤을 새도 모자라겠지만 지금도 어제처럼 기억나는 몇 장면 중 하나는, 외국에서 합숙 기간 중 벌어진 일이었다. 현지에 계신 가족분들이 우리 일행을 모두 초대하여 모처럼 한식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는데, 서양식 가정집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파티처럼 대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섞여있던 우리 일행의 아이들은 각자의 접시를 (뷔페 먹듯이) 들고 음식을 덜어와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했다. 하지만 '다 먹은 사람은 개수대에 접시 잘 가져다 놔야해' 라는 선배들의 지시를 가로막은 '선생님'의 말씀은 "남자는 주방에 들어가는 거 아니다, 영희가 철수 접시까지 같이 챙겨줘라"는 것이었다. (이름은 가명) 고작 초등학교 4-5학년 꼬마들이었던 아이들조차 동공지진이 일어나던 그 표정이 생생하다. 보다못한 내가 아이들 접시를 다 걷어 치우면서 문제는 일단락 되었고, 나는 철수에게 다가가 '너 여기서만 이런 거 알지' 라고 애꿎은 쥐어박음을 했지만, 이미 2000년대였던 그 날의 일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고는 세월을 뛰어넘어 엊그제 갑자기 마주친 것이었다.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는 '편애'의 장면을,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낯빛을. 조직이 작으면 여전히 구성원들은 해바라기처럼 대표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이 모든 인정과 의사결정이 대표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본심과 상관없이)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하는 자리가 최상위 리더(=대표)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대표님도 (갑작스럽긴 하지만) 종종 형평성을 언급하실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날 내가 맞닥뜨린 것은 '애정이 끓어넘친 나머지' 주변의 모든 것을 잊은, '사랑에 빠진' 그분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태도와 행동이었다. 민감한 나만 느꼈고 남겨진 다른 이들은 아예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격자인 내 입맛이 그토록 씁쓸할 정도였는데, 혹여 '나머지' 중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이를 가슴에 담았다면 꽤 오래 서운함이 맺혔을 일이었다. 


배운 점은 두 가지. 내가 말한 대로 행동하고 있는지, 내가 생각하고 꿈꾸는 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늘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 그리고 지나치게 화가 나거나 지나치게 기쁠 때는 나의 언행을 더욱 조심하자. 옳지 못한 판단을 한다기보다 그냥 판단 기준 자체가 잠시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 같다. 아직도 감정이 남아 글이 제대로 정리가 안되네. 언젠가 옛날 이야기는 따로 풀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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