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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Apr 18. 2020

엄마의 순간

아이 생일 그리고 나의 짧고 굵은 휴직 2일 전.

주말에 돌입했으므로 돌아보지 않아도 되지만 마지막으로 부탁 받은 일이 하나 있어서 아직도 근무 중인 것만 같은 날. 남은 일을 탁 털어냈으면 좋으련만, 오전에는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스터디 모임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곧 이사갈 새 집의 동서남북 길이 실측을 하러 다녀오고 저녁에는 내내 아이와 마주 앉아 48시간 한정으로 오픈된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25주년 기념 실황 공연 영상을 두 번이나 봤다.


놀이터에 가고 싶다는 아이를 집으로 끌고 들어오는 길에 조금 마찰이 있었고 수학 학습지를 언제 풀 것이냐 하는 문제로 조금 옥신각신 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아이는 내 말을 잘 따르는 편이고 나도 아이를 딱히 간섭하거나 윽박지르는 일은 많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아이와 둘이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고, 나는 붙박이처럼 노트북 앞에 앉아 웹서핑이나 온라인 쇼핑이나 콘텐츠 읽기나 독서를 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끊임없이 나를 불러대면서도 자기 할 일을 하고 집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곤 한다. 각자도생이다.


잘하고 있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아마 나의 태도는 '때리지 말고 설득하라'는 것에 부합하는 것만 빼면 대부분의 육아서나 관계서가 권장하는 방식을 하나도 취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만큼은 아이에게 적극적으로 집중해 주어라, 아이가 부모에게서 온전히 욕구를 충족하고 나면 다른 곳에서 크게 개의치 않는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게 대부분의 '지도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안하고 못하고 있다, 그냥 나는 그 공간 안에 물리적으로 같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는 오늘따라 착하게 제 시간에 다가와 '이제 양치할게' '이제 자러 들어갈게' 착착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잔소리하고 이것 저것 시키고 하지말라는 게 많아도, 딱히 엄마와 뭘 같이 하는게 아니더라도 엄마가 그냥 있으니까 좋단다. 고맙기도 하고 (짠하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 어떻게 하면 이 애틋함을 해치지 않으면서 차츰 서로 자립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이는 내가 휴직에 돌입한다는 것을 모른다, 휴직이라는 말도 꺼내지 않을 예정이고 다만 회사에 신청해서 오전에는 집에 있다가 오후에는 일하러 나가는 시간제로 지낸다고, 이모님에게는 말씀드려야겠다.


자기 전에는 아마도 '못다 끝낸' 그 일을 어떻게 내일 하루에 해치울 것인가, 보다는 도대체 내가 아까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을 보면서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눈물이 났는가, 곰곰히 생각해보려 한다. 그냥 그 시절이 그리웠다고 하기에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순식간에 나를 치고 들어왔고 나는 그저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게다가 중간 중간 공연은 스터디 시간의 BGM처럼 활용했음에도 마지막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크리스틴이 유령에게 '도대체 너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거니, 신이 내 마음을 움직였어, 이 세상에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내가 알려줄게' 하는데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였다. 


내일은 그 순간을 돌아보며 글을 써야겠다. 오늘은, 아이가 내게 준 '조금 더 큰 고마움'을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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