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에 시골 엄마에게 다녀왔어요. 92세 울 엄마는 예년과 달리 움직임이 불편해 곁에서 부축해야 하는 상태에요. 물론 총기는 아직 좋아요. 내가 육회를 좋아하는 것도, 내 딸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자세히 기억할 정도니까요. 그런 울 엄마에게 마늘 심은 게 두 주가 지났는데도 왜 싹이 나오지 않는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세상에 금방 나오는 건 없다면서 찬찬히 기다리라고 말했어요. 오늘 아침에 그런 심정으로 텃밭을 들여다봤더니 드디어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정호승 시인의 〈기다림〉에는 제주도 만장굴이 나와요. 그 동굴은 용암이 흘러가면서 만든 어두컴컴하고 긴긴 동굴이죠. 지금은 세계자연유산으로 올라가 있어요. 정호승은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만장굴에 빗댄 거였어요.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시대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묵묵히 참고 기다린 사람들의 희망을 읊조린 것 말이죠.
“피카소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열다섯 살 때부터 이미 벨라스케처럼 완벽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당시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던 화가인 벨라스케는 거장의 상장이었죠.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육십 년이 걸렸다고. 완벽한 기술을 습득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위해서는 평생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거예요.”(151쪽)
정여울의 〈데미안 프로젝트-눈부신 ‘나’를 발견하는 특별한 순간〉에 나온 내용이에요. 피카소도 완벽한 기술을 습득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더 오래도록 개성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는 뜻이죠. 그것은 〈데미안〉에 나온 말과 똑같겠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 속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만의 세계를 깨트리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신의 대변자 데미안이 조언해 준 말이죠. 정여울은 그걸 MBTI의 토대를 제공한 융의 ‘개성화’로 말하고 있고요.
그렇듯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고전 〈데미안〉을 중심으로 자기 발견과 내면 성장의 여정을 풀어낸 인문 교양서에요. 〈데미안〉을 해석하는 걸 넘어서서 자아, 관계, 고난 등 내면의 성장을 위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하죠. 싱클레어가 겪는 혼란도 자신이 억압했던 감정과 욕망과 기억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부정했던 어두운 부분까지 포용해야 한다는 것 말예요. 물론 거기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37:7-9)
구약성경의 시편에 나오는 다윗이 쓴 시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다윗이 인생의 뒤안길을 떠올리며 다음 세대에게 교훈코자 쓴 거죠. 악을 행하고 불의를 일삼는 이들 앞에 분노하거나 악으로 되갚기보다 하나님 앞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라고 말이죠.
우리말 ‘참고 기다리라’는 히브리어 ‘훌’(חוּל)은 ‘몸부림치다’ ‘고통받다’ ‘춤추다’ ‘떨다’ ‘낳다’는 뜻이에요. 여러 의미가 있는 셈이죠. 그런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훌’이란 단어를 그렇게도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치 산모가 사랑스런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맞이하는 해산의 고통 말이죠. 그만큼 ‘훌’은 창조의 꽃으로 피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에요. 예수님이 찬란한 부활을 맞기까지 십자가의 고통을 통과해야 하듯이요. 다윗은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도록 권면한 것이죠.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영혼의 자서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죠. 자신의 정원에서 나비의 누에고치가 작은 구멍을 뚫고 나오려고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누에고치에 대고 입김을 불어 준 것 말이죠. 그러자 나비가 온기를 받아 얼른 고치에서 빠져나와 날았는데, 날자마자 그의 손바닥 위에서 죽었다고 하죠. 카잔차키스의 성급함이 나비를 죽게 만든 꼴이었죠.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뭐든 성급하게 한 번에 결정하기보다 우리 안에 있는 애벌레가 개성화를 이루기까지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것 말이죠. 그래서 때가 되면 마늘밭에 새싹이 솟아오르고, 만장굴의 그 끝이 보이고, 15살에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30살에 왕위에 오른 것처럼요. 신혼부부에게 아이가 들어서기까지 때로는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요. 피카소가 자신만의 개성화를 이루기 위해, 싱클레어가 자기 내면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