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사춘기

원더브라를 찾아서

by 명혜


이번에 고향집에 내려가 엄마와 나눈 순간이 트리거가 되었는지 마음이 온통 검은 벽으로 조여 오는 숨이 꽉 막히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살면서 어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와도 아버지가 부적처럼 새겨 넣은 내 이름의 밝을 명 덕분인지 세상 쾌활하게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었는데, 딱히 무슨 큰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나름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생각한 순간에 불쑥 맞닥뜨린 이 두려움과 불안감의 정체가 너무 불편하고 무서웠다.


오늘 몇 년간의 중국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의 침대만 있는 텅 빈 집에 놀러 가 6시간을 쉴 새 없이 먹고 마시고 떠들다 내게 찾아온 그 두려움의 정체를 조금 알아냈다.


중년의 위기란다. 친구도 친구의 친구들도 조금 다른 시기와 강도로 비슷하게 겪고 있는 중이라 했다. 결혼을 했건 하지 않았건, 아이가 있건 없건 모두.


그간 나는 종교가 필요 없다 생각할 정도로 부모님이 내게 정신적으로 든든한 의지처였던 거다. 잘 먹고 잘 웃는 것만으로도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자라왔고 여전히 너의 마음이 행복한 길을 찾아라 응원해 주시지만 우주처럼 강인하고 넓어 보였던 부모님의 사랑도 험난한 삶을 애쓰며 버티고 살아내는 그저 나와 같은 한 인간의 평범한 무엇이었구나를 살갗으로 느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늙고 지친 부모님에게 더 이상 예전처럼 의지할 수 없고 이제 조금씩 그들이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예정된 시나리오에 화를 낸다고 멈춰지지 않는 부모님의 늙음에 바보같이 화를 내고 엉엉 울어버렸다. 이런저런 이유를 궁색하게 갖다 대며 울었지만 늙고 약해져 가는 부모님을 받아들이기 힘겨워 그랬던 거 같다. 아직 그 사랑에 제대로 보답도 증명도 하지 못했는데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까 봐 조급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는 굉장히 씩씩하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실은 굉장히 겁이 많다. 농담 섞어 나는 비빌 언덕 있으면 일단 비비고 보는 의존적인 사람이리 자평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정말 완전한 성장과 독립을 꿈꾸며 내면에서 조용히 투쟁해 왔다. 요가 수련을 할 때 어떤 자세의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데 유일하게 집착하며 연습하는 것이 헤드 스탠드, 시르사아사나다.


넘어졌을 때 받쳐줄 벽을 뒤에 두고 하면 이제 어느 정도 버티어 서는데 벽이 없으면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 발을 들어 올리다 만다. 마치 그 벽이 나의 의존성을 상징하는 거 같아 삶에서도 요가 수련에서도 몇 년째 나만의 조용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러니까 시르사아사나는 내게 육체가 아닌 정신적 차원의 도전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수영장에서도 옆에 레인줄과 벽이 없으면 이도저도 못하는 바보구나 젠장. 그래도 그 두려움을 벗 삼아 접영까지 꾸역꾸역 배웠다.


이따금씩 우울증이 찾아온다는 친구는 긴 세월 치열하고 힘든 회사 생활을 유일하게 버티게 해 준 세계 여행이 이젠 어딜 가도 거기가 거기인 거 같아 설렘과 열정이 사라져 버렸다 한다.


이번에 한국에 돌아와선 금요일 회사에서 퇴근하면 침대에서 꼼짝 않고 무기력하게 잠만 자다 월요일이면 겨우 몸을 일으켜 출근하는 일상을 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 가구도 채워 넣지 않은 썰렁한 절간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내가 이번에 어떻게 침대에서 일어났는지 알아? 핸드폰을 보는데 마음에 쏙 드는 원더브라를 발견한 거야. 갑자기 그 브라를 사고 싶어 벌떡 일어났지 뭐야.

이름 그대로 정말 대단한 원더브라다


헤어지며 서로 잘 의지하며 중년의 사춘기를 무사히 보내자고 함께 토닥였다.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때 그간 새로 찾아낸 또 다른 원더브라를 나누자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삶의 열정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원더브라가 아니라 원더빤스라도 구해야지 아무렴. 이 사회의 허리, 중년들이여 힘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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