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IMF 시기에 나는 홍콩현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그 해 3월에 딸이 태어났다.
홍콩의 악명 높은 아파트 임대료는 IMF전에도 내 해외현장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벅찰 만큼 비쌌다. 당시 홍콩 외곽의 NT(New Territories) Shatin 지역의 약 15평 아파트 월 임대료가 80만원이었다. 하지만 IMF사태가 발발하자 환율로 인하여 160만원이 되어버려, RJ 그리고 갓 태어난 딸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며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무겁게 밟히는 RJ와 딸과 함께 살 수 있는 국가의 현장을 찾다가 선택한 곳이 이집트의 카이로 이었고, 1999년 말 즐거운 마음으로 RJ와 딸과 함께 생면부지의 이집트 카이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카이로 중심에서 약 20분 떨어진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아디”에 우리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라때”의 해외건설현장 근무는 지금의 워라밸 관점으로 보면 열악하기만 했다. 오전 7시까지 출근해서 평일은 밤 10시에, 토요일은 오후 5시에야 퇴근했고, 일요일은 격주로 쉬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이집트 생활 초기, RJ와 딸은 내가 출근하고 나면 둘이서 감옥생활 아닌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인근에 회사동료 가족들의 집들이 있었지만 놀러 가고 싶어도, 인도가 없고, 무질서한 난폭운전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늑대 같은 야생개가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거리를 걸어서 가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동양인 여자가 어린아이와 함께 택시를 타는 것은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선 불안했다.
[소꿉놀이/마아디]
[카이로박물관]
기다리던 어느 금요일 아침이었다.(이슬람교인 이집트는 금요일이 휴일이다.)
우리는 딸을 데리고 카이로 동물원에 소풍을 가기로 했다. 딸이 좋아하는 거버 이유식, 맥도널드 너겟과 프렌치프라이즈 그리고 김밥을 싸서 동물원으로 향하였다.
딸은 당시의 이집트에서는 보기 힘든 동양의 통통하고 뽀오얀 귀여운 아기였다.
동물원 입구를 통과해서 들어가자, 많은 현지인들이 가족단위로 나들이를 나와서 그늘아래 자리를 펴고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들도 우리하고 똑같이 사는구나”라고 느끼며, 흔치 않은동양인 가족인 우리에게 쏟아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용기 내어 헤치며중앙의길로발걸음을 떼었다.
몇 걸음 움직이기도 전에 어느 한 분이 수줍게 다가와서 먹고 있던 음식을 권하였다. 표정에 예의를 담아거절하며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어디서 왔느냐”는 등의 가벼운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중에, 그분의 가족으로 보이는 부인과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우리의 주위로 와서는 딸을 유심히 보며 수군거리더니, 아이 한 명이 딸을 가리키며 순진한 눈빛으로 “Photo?”라고 하였다.
나는 일이 얼마나 커질지 모르고 선뜻 “OK”라고 해버렸다.
딸을 안고 사진을 찍고 싶다는 추가 요청에 약간의 경계심이 일었지만, 그 선량한 눈빛과 수줍은 태도에 거절하기가 쉽지 않아 딸을 넘겨주는 순간, 그분의 꼬질꼬질한 손과 딸의 불편한 표정 그리고 뭔지 모르는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던 주위의다른 여러 가족들이 일어서더니, 우리 가족 뒤로 주춤주춤 모여들었다.
“설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들은 우리 가족 특히 딸과 사진을 찍기 위하여 기꺼이 줄을 서고 있었고, 이미 꽤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많이 당황스러웠다.
이 분들의 선량한 눈빛과 수줍은 태도에서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전혀 낯선 나라에서 익숙해지기도 전에 더군다나 가족들이 함께 있는데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딸을 꼭 싸 감아 껴안고,
어색한 미소를 과하게 장착하고,
많은 “No”와 “Sorry” 남발하며,
현지분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뒤로하고,
동물원 입구에서 몇 걸음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뒤돌아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카이로 어느 가정집 벽에 딸의 사진이 걸려있을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그 상황을 지금 다시곱씹어보면,여전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때와똑같은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악의 없이 호의로 다가갔는데 우리가 놀란토끼마냥 허겁지겁 나가버리는 것을 보고"좀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