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ttle Creatures Apr 02. 2020

아들이 태어났다

이제는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아들(J)은 2003년에 태어나서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다.

육아의 첫 경험인 딸(P)에게는 작은 것 하나라도 '해'가 될까 두려웠고 뭐든지 조심스러웠으며 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필요이상으로 '과'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J를 다르게 대했다.
얻어온 분홍색 옷을 거리낌 없이 입혔고, 가격이 싼 분유를 선뜻 선택했고, 칭얼거림이 있어도 허둥지둥하지 않았으며, 다른 아이들에 비해 늦더라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J는 무던하면서 둔했고 표정은 무심한 듯 뚱하고 멍했다. P는 똥을 싸면 싸기 전부터 얼굴이 붉어지고 칭얼대면서 강한 신호를 보냈는데, J는 쌀 때도 싸놓고도 티를 내지 않았다. 우리가 냄새로 확인했을 때는 닦아주기도 힘들 만큼 이미 문질러 놓은 후였다.

또, 어릴 때부터 J는 말이 많치 않았고 생각은 사려 깊었으며 행동은 무거웠다. 뭔가 하고 싶거나 가지고 싶은 게 있어도 조르거나 떼를 쓰지 않고 지나가듯이 한마디 쓰윽 던졌다. 엄마(RJ)는 우리라인(나와 딸)에 대적하기 위하여 J를 억지로 자기 라인으로 편입하였는데, 그래서인지 RJ는 이런 J의 한 마디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고, 결국 J는 자기가 원하는 이상을 지나가듯이 던진 한마디로 이루어 내었다.

이제는 나보다 훌쩍 커버린 키. 지는 자기의 힘으로 유전자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J는 어릴 때부터 내가 자기를 타고 앉아 두 손이 내 한 손에 제압당하고 볼을 요리조리 내어주며 뽀뽀를 당해왔던 자신의 흑역사를 갚아주고 싶나 보다. 요새 가끔 나의 힘을 시험해보고자 팔씨름을 신청해온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림도 없지만 팔씨름 할 때 눈빛을 보면 그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직 아들에게 질 때가 아니다.

원래 RJ와 J는 사우디로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사우디 독신생활로 내 건강에 이상신호가 발생했고 RJ와 J는 기꺼이 사우디로 와주었다. 감사한 일이지만, J는 사우디로 온 이후 내 건강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참여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체중감량을 위해서 나를 끌고 Gym으로 갔고, 내 사우디 독신생활을 지켜준 라면은 일주일에 한번 국물 빼고 면만 허락했고, 음식은 철저히 정량이하만 주었으며,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마트에서부터 통제를 당했다.

이를 위해서 말없던 그 넘이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시기:2003년 /장소:한국


배가 아프단다.

토요일 퇴근해서 오니 RJ가 배가 아프단다. 이때는 출산 예정일이 다가와 있어 바로 낳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난 잔머리 가득한 부탁을 했다. 회사에서 주어지는 출산휴가를 온전히 다 사용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월요일에 낳자고 했다. RJ는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한다.


J의 다리가 비틀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 부부에게는 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 몇 개월 전 컬러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J의 다리가 뒤틀어져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가능성이 있는 의심되는 사실을 부모에게 알려야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 말에 섭섭했고 또 무서웠다.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RJ는 한동안 흐느꼈고 나는 내가 마음을 다 잡아야 해서 제대로 된 위로조차 해주지 못했다. 이후로도 계속된 컬러 초음파 사진에서 의사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출산해봐야 알겠다고만 하고 다리가 비틀어지지 않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J가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 약속했다는 듯이 이에 대해서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J가 태어났다.

RJ는 기특하게도 최선을 다한 듯하다. 노력해보겠다던 월요일 아침에 출산준비 가방까지 다 싸놓고는 내가 깨기를 기다렸다가 출산해야겠다며 병원으로 가자고 한다. 나는 P때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J의 다리를 직접 확인하고자 분만실에 들어갔다. RJ는 원래 표현을 호들갑스럽게 하는 편이 아니지만 출산의 고통은 견디기가 어려웠나 보다. 내어준 내 손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지켜보는 나는 그냥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내 신경은 온통 J의 다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J가 태어나는 순간 나는 J의 얼굴도 보지 않고 가장 먼저 다리 상태가 뒤틀어져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RJ와 같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기억에 없다. 손가락과 발가락 개수도 확인하고 탯줄도 잘랐다는데…


RJ가 위험했다.

J는 4kg의 우량아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감사한 일이다.

분만실에서 나와 대기실에 있는데, 분만을 담당했던 의사가 다시 가운을 입으면서 RJ가 있는 분만실로 급히 들어갔다.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기분이 쏴했다. 조금 있으니 의사가 부른다. RJ의 자궁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있어, 출혈이 지속된다면 자궁제거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동의해달라고 한다.


지금도 '자궁제거'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냥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만약 꼭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해주세요”라는 무기력한 답변만을 했다. 다행하게도 감사하게도 RJ는 출혈이 멈춰서 입원실로 옮겨졌다.


P는 엄마 껌딱지

출산을 위해서 할머니에게 맡겨두었던 P는 3분마다 한 번씩 할머니에게 “엄마는?” “엄마 보고 싶어요”라고 했다고 전한다. 할머니가 “엄마는 너 동생 낳아서 병원에 있어야 한다”라고 잘 설명을 해주고 돌아서면 또 똑같이 “엄마 보고 싶어요”라고 큰 목청으로 울어대서 하는 수없이 할머니는 한밤중에 P를 입원실로 데리고 왔다.

P는 입원실에서 엄마에게 안겨서 잤다.


이렇게 태어난 J는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 집에서 귀여움을 담당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딸이 태어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