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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뽕삼 Sep 26. 2015

소규모 에세이 ; 습작 by 뽕

3인 3색, 같은 소재 달리 보기

일곱 번째 소재


습작


글, 사진 / 뽕


나의 습작 변천사 

   

  Step1. 일기쓰기

  언제부터였을까.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한 것이. 습작의 범위를 ‘글’로 좁혀서 생각해 보면 내 최초의 습작은 ‘일기쓰기’가 아니었나 싶다. 초등학교 시절 의무로 썼던 일기쓰기. ‘그림일기’→ ‘깍두기 노트’ → ‘줄 노트’로 승격(?)하면서 일기를 써 내려갔다. 유독 일기쓰기 귀찮은 날을 제외하곤 대체로 일기를 성실히 썼는데, 무언가 쓰는 것이 그다지 괴롭지 않았기 때문이다.(솔직히 재미있었다.) 일기를 읽은 담임선생님이 달아주시는 코멘트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사실 나는 ‘일기쓰기’에 빚진 것이 많다. 아무 생각 없이 일기를 매일매일 쓰다 보니, 시나브로 문장력이 향상 되었고, 어느덧 매달 전교생들이 보는 앞에서 ‘일기상’을 받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무언가 인정받는 일이 생기니, ‘잘 한다’고 믿게 되고, 그 믿음이 ‘글쓰기’를 이어가게 해주었다. 

    

Stpe2. 백일장 

  중학교 시절엔 백일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다른 친구들이 학과 공부에 매여 있을 때 탁 트인 곳으로 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 땐 학교를 벗어나기만 하면 뭐가 그리 좋았는지! 글 쓰러 가는 날엔 소풍 가는 기분이 들어 늘 들떠 있었고, 백일장 주최 측에서 나누어 주는 빵과 우유를 먹는 게 즐거웠다. 뿐만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글쓰기가 크고 작은 상을 안겨주니,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Step3. 글쓰기의 위기     

  글쓰기의 위기가 찾아온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이때부터는 참신한 발상만으로 상을 받기 어려웠다. 쓰려는 주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했고, 사유가 담긴 문장을 써야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입시 준비 때문에 백일장에 참여하는 횟수가 줄었지만 원고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일은 잦아졌다. 그러다 마감 시간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겨우겨우 써서 내는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놓지 않았던 건 공부를 특출 나게 잘 하는 학생이 아니었고, 다른 분야에 이렇다 할 특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수학 때문에 대학 입시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숫자에 약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수학책을 외웠다고 하면 감이 올 것이다.) 그러니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Step4.  문학특기생(X) , 빛 좋은 개살구(O)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결국 글 쓰는 학과를 선택했고 (운 좋게)입시 전쟁을 치르지 않고 문학특기생 전형이름하야 ‘날로 먹기’으로 대학생이 되었다. 이 별 것 아닌 이름이 스무 살의 허세를 부채질 한다. 그러나 그런 기고만장함도 오직 신입생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Step5. 습작생의 수난 

  학부 2학년 때 A4용지 10장 분량의 단편소설을 쓰며, 나는 학과 선택에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절망하고 좌절한다. 원고지 열 장을 채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렇게 꾸역꾸역 이어붙인 문장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일은 더 힘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과제를 미제출하고 F를 받을 만큼의 배짱을 지닌 학생이 못 되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소설을 제출했다. 소설 수업 첫 시간에 지도교수님께 좋은 인상을 주어 기대가 크셨던 걸로 아는데, 교수님은 내 글을 읽으며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셨을 것이다.     


나의 첫 소설
  “문장은 괜찮아요, 근데 인물이 너무 많아요. 사건도 없고요. 결말이 왜 이렇게 끝나는지 납득이 가지 않네요.” 


  내 글을 합평하던 날의 풍경은 저 문장으로 충분하리라고 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날카롭고 허를 찌르는 비평이었는데, 그때는 그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했다. 누군가 분노에 차서 내가 쓴 글을 갈기갈기 찢는 느낌이었고 사람 많은 데서 발가벗고 매 맞는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책상 위로 내 소설 인쇄물이 놓이면서 글씨가 써졌다.      


  “울지 마.”      


  고개를 들어 보니, 지도교수님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장을 넘겨보아도 빨간 펜으로 교정한 흔적은 없었다. 교수님은 참으로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대학교 3학년 때도 <소설 창작> 시간에 계속 수난을 겪는다. 목소리가 크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던 교수님의 촌평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네 소설에서 비린내 나.”      

  

  이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글을 쓰겠다고 덤벼든 내가 얼마나 순진했었는지 처절하게 자각한다. 졸업 무렵엔 거의 매일 같이 학교 호수 주변을 산책하며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여전히 잘 쓰는 것은 어려웠고, 그래도 졸업은 해야 했기에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써서 냈다.  

  

(잘 쓰고 싶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필사했다.



Step6. (글을 쓰지 않는) 직장인의 일상 

  졸업 후 나는 하루 8시간씩 모니터를 봐야 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각종 문서 작업은 했지만 창작을 하지는 않았다. 일이 끝난 후 무언가 좀 써보려고 해도 2주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사회생활 2년 차 정도 되었을 때 같은 과 동기 언니로부터 글쓰기 모임을 시작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졸업 후 처음으로 소설 창작을 했고, 학부 때와는 다르게 업무와 상관없는 딴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신 나게 썼다. 하지만 내 소설을 읽은 멤버들의 표정은 심각하고 어두웠다. 더 이상 소설을 써야 할 명분도 동기도 찾지 못한 나는 글을 쓰지 않는 일상을 보냈다. 

     

  Step7. (글 주위를 맴도는) 자유인 

  직장을 뛰쳐나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을 땐 글 주위를 맴돌았다. 동네 도서관에서 하는 글쓰기 수업에 참석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인사동으로 가서 동화쓰기 수업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완전히 외면한 채 살 수 없어 다시 어딘가에 소속되곤 했다.      


Step8. (다시) 직장인, 쑥의 눈빛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이며, 이십 대를 지나 삼십 대가 되었다. 회사에 불만이 있어도 아무런 대책 없이 ‘그만 두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지혜와 적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처세술을 겸비하게 되었고, 두려움이 많아졌다. 어느 날 쑥으로부터 브런치를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모든 것에 지쳐 있던 때라서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쑥의 ‘눈빛’ 때문이었다. 간절함이 담긴 눈빛. 그 눈빛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 와 ‘그래, 한번 해보자’라는 대답을 이끌어냈다. 


Step9. (글쓰기)시작, 브런치를 만나다

  무언가 쓴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쓰지 않을 때보다 생기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이야기든 쓰고 있을 때면 ‘아, 나 살아 있구나!’ 느낀다. 이 자리를 빌려 이렇게 다시 쓰게 해준 쑥과 묵묵히 함께 걸어주는 삼, 그리고 내가 어떤 글을 써도 재미있고 의미 있게 읽어주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심심한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아직도 핑계대지 말고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살지 말라고 이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았다고, 그러니 조금 더 힘을 내라고. 




쑥뽕삼의 <같은 시선, 다른 생각>은

서른을 맞이한 동갑내기 친구 3인의

같은 소재, 다르게 보기 활동을 사진, 그림, 글로 표현한 공동작품모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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