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정리하던 날
봄에 이사를 간다.
여기서 3년을 살다 간다.
집안일이란 걸 해보니 며칠만 신경 쓰지 않아도 티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평일 퇴근한 저녁이나 주말이 되면 쉬고 싶은 마음을 열심히 참아가며 살림을 꾸려나갔다. 사실 '간신히' 살림을 꾸려나갔다. 간신히 꾸려나간 살림에는 3년의 시간만큼 흔적이 남았다.
거실 한켠에는 한때 강한 지적 호기심과 일말의 의지를 갖고 구매했던 책들이 쌓여 있었고 층층의 책 위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붙박이 책장에는 꽂힌 책 위 빈 공간에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다른 책들과 함께 세일할 때마다 쟁여놓았던 클렌징폼, 로션, 샴푸와 같은 소모품이 아무렇게나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펴놓은 6인용짜리 테이블 위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다이어리, 수첩, 핸드폰 충전기, 핸드크림, 안경닦이, 노트북 등 매일 쓰진 않지만 필요할 때 바로 보여야 하는 물건들이 불규칙적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 옆 식탁에는 크기가 각기 다른 텀블러들과 매일 먹는 각종 영양제,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약, 매달 배달시켜 마시는 생수통이 점령 중이었다.
한 번씩 가스 검침원이나 이웃이 갑자기 방문할 때면 지저분한 집꼴을 들켜버린 쪽팔림은 온전히 내 몫이었지만 그건 솔직히 별 문제는 아니었다. 회사 책상은 깨끗하게 정리 정돈하는 내가 집에서는 간신히 살아간다는 것을 회사 사람들에게 들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의 치부의 쪽팔림은 잠깐 참으면 되는 찰나의 것이었고, 내가 일상에서 겪는 무기력과 우울감은 만성적인 것이었다.
가장 힘든 건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나의 시선이었다. 내 몸에 꼭 맞는 옷의 봉제선은 신경 쓰면서, 반듯한 가르마와 단정하게 올려 묶은 머리모양은 신경 쓰면서, 흐트러짐 없는 뒷모습까지 신경 쓰면서 타인의 시선이 없는 내 시선만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 나는 이다지도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이, 이다지도 간신히 공간을 붙들고 있다는 생각이 한 번씩 잠 못 드는 새벽, 거실에 우두커니 앉은 내 앞으로 깊은 우울을 품은 파도처럼 나를 집어삼키곤 했다.
나는 책 사는 것을 좋아한다. 인문학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인문학 전공자로서, 이 시대에 인문학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끔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은 책을 소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 밥벌이를 하면서부터는 책을 꾸준히 소비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나가 뛰어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책에 몰두하는 편이 더 즐거웠다. 조용히 책을 읽을 때도 있었고 소리 내서 동화구연하듯 책을 읽기도 했다. 학생 때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자세를 바꿔가며 몇 시간이고 책에 집중하기도 했고 직장인이 돼서는 꼭 읽지 않더라도 가방에 책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때때로 책은 내게 취미 이상의 것이었다. 달리 내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을 때, 공부해야 할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 꿈은 컸지만 현실이 초라할 때, 도움을 구할 사람이 없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내가 얻고자 하는 답을 내어줄 책을 골라 읽는 것이었다.
나는 외롭게 자랐다. 감정이 가장 섬세했던 시기에 우리 가족은 화목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 시기 많이 다투었고 나는 방 안에서 숨죽여 많이 울었다. 원래도 당신의 자녀와 소통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딸인 나에게만큼은 다정했던 아빠는 그 시기 한 번씩 난폭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상처가 되었던 것은 불화를 겪었던 그 순간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밤이면 무섭게 싸워대던 엄마 아빠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예전 일상으로 돌아간 이후였다. 집안의 무거운 긴장감 속에서 눈치만 살피던 어린 나는, 다시 세팅된 게임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 눈앞에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부모님의 모습에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우울을 느꼈다. 그땐 그 감정이 어떤 건지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다.
몇 년 후 나는 그게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무시에 대한 분노였다. 달랑 네 명뿐인 이 가족 구성원들 중 셋은 줄곧 내가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어려서 잘 모를 거라는 단정을 짓고 가족 일에서 나를 소외시켰다. 밤이면 거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대화소리를 기억한다. 엄마는 나보다 고작 세 살 많은 오빠를 의지했다. 엄마는 아빠와의 불화와 내가 모르는 어떤 삶의 무게를 오빠를 통해 위안받고 덜어내고자 했다.
잘 들리지 않는 대화소리를 들으며 나는 불 꺼진 방, 침대 위에 앉아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다. 나는 편하게 울지도 못했다. 나는 내 방 문을 열고 그 둘에게 가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자는 척을 했다.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내가 짐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내가 선택한 최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설명해 주기를.
나는 끝까지 그 세 명으로부터 우리 가족이 어떤 상황인 건지, 무엇이 문제인 건지 아무것도 공유받을 수 없었다. 불안과 눈물에 대한 사과도 받을 수 없었다. 어떤 때에는 토해내지 못한 나의 감정들이 내 목구멍을 조여와 목에서 통증을 느끼기도 했다.
달리 마음을 둘 곳이 없는 나는 책을 읽었다. 안식처를 필요로 했던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구원해 줄 책을 찾았다.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을 읽은 날 나는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모조리 사서 읽었다.
3년 전 이 집에 이사 올 때 본가의 내 책들을 다 가져왔다. 함께 많은 책을 옮기는데 힘들었던지, 남편은 꼭 모든 책을 집으로 다 가져와야 되냐며 볼멘소리를 했었다. 나는 고민의 여지도 없이 이 책들을 모두 가져와야 했다. 나의 외로운 시간을 품어주었기에.
책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안 곳곳에 널브러진 책들은 모두 이곳에 이사 온 후 내가 소비한 책들이었다. 물티슈로 책을 하나하나 닦으며 이 책을 언제 샀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불필요한 책과 계속 간직할 책을 나누었다. 불필요한 책은 중고서점에 판매할 생각이었다.
책을 정리하다 웃음이 났다.
3년간 한 권씩 샀던 책들을 모아보니 대부분 소통,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이었다. 점점 관리자를 향해 가는 나의 연차에서 소통과 협업은 늘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대부분의 책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책은 굉장히 흥미로워서 앉은자리에서 두세 시간 만에 완독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적용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는데, 지금 당장 기억에 남는 내용이 없었다.
다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저 책을 고르고 샀는지는 기억한다. 당장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발악으로, 내가 조금이라도 더 달라지면 내 회사생활이 지금보다 덜 힘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 거기엔 커리어, 회사, 팀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한때 크기가 컸던 내 꿈도 있었다.
저 책들 중엔 그 당시 사고 싶지 않은 책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샀던 이유는 자기 위안이었다. 내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을 수 있게끔 만드는 자기 위안. 시간과 돈에 정성을 쏟았으니 나는 노력한 것이고 그것이 당장 그날의 불면에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새 책과 다름없는 이 책들은 그 당시의 나처럼 내일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누군가에게로 옮겨갈 것이다. 그 누군가의 내일은 어제보다 더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