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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다녀온 후 (1) : 겨울이 싫어서

겨울 나기

by 리틀 골드문트

집 소파에 누워 쇼핑앱으로 아이쇼핑을 하던 중이었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는 대뜸 전기장판이 유명한 브랜드에서 전기장판을 세일해서 팔길래 나를 주려고 샀다고 말했다.

나는 난데없는 전기장판이 무슨 얘기인가 싶었다. 아빠는 이틀 전 내가 부모님 댁을 방문해서 오빠와 다 같이 모여 얘기를 하다가 부모님 집 내 방이 참 추웠다는 얘기를 한 게 마음에 걸려 전기장판을 샀다고 했다.


"아빠 뭘 또 샀어요, 지금 사는 집 따뜻한데."

"그래도 한번 써봐, 테레비에서 보니까 이거 세탁기로 돌려도 된다고 하대."


독립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틀 전 내가 했던 말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아빠는 딸이 그 방에서 몇 년간 춥게 살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지금은 내 방을 본인의 서재방으로 사용하시면서 '네 방이 참 춥더라'라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아빠와 통화를 끝내고 아까 보던 쇼핑앱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의 걱정과 미안함이 담긴 자식을 향한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면서 어쩐지 쇼핑앱을 보기가 싫어져 꺼버렸다.

말하지 말걸. 괜한 후회가 남았다.








부모님 집은 햇빛이 잘 들어오는 남향이었지만, 유일하게 내 방은 해가 잘 들어오지 않는 음지였고, 참 추웠다. 전에 살던 사람이 베란다를 텄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외풍이 심했다.


겨울이면 추위를 잘 타는 나를 위해 아빠는 뽁뽁이와 스티로폼을 사서 외풍을 차단해보려 하셨고 엄마는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고 방 안에 난로를 두셨지만 전기장판을 틀고 일어나면 전자파가 나오는지 머리가 멍했고(전기장판에는 전자파 차단이 확실하다고 쓰여있었지만 전기가 오르는 느낌이 나곤 했다) 난로를 쓰면 일산화탄소 때문인지 두통을 느꼈다. 나는 겨울이 채 오기도 전인 10월 말부터 전기장판을 꺼냈고 3월이 넘어서까지 쓰곤 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고 나니, 안 그래도 겨울을 싫어하는 내가 추위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독립해서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집이 따뜻한가'였다. 복도에 창문이 있는지, 집 안에 중문이 있는지, 남향을 끼고 있는 집인지를 확인하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왔다. 부모님 댁에서 살 때와 비교하면 훨씬 따뜻하게 살고 있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을 '모기'에 비유하곤 한다. 1년이 아닌 3개월을 산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나타나서 지치지도 않고 인간을 귀찮게 하는 모기처럼, 나는 여름에 이르러서야 내 에너지가 온전히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줄곧 한국에 추위가 찾아올 때면 따뜻한 나라로 여행하는 것을 꿈꿨다. 2년 전 9월 말 날씨가 제법 쌀쌀해질 무렵 홍콩으로 여행을 가면서 나름대로 버킷리스트를 처음 이뤘다.


발걸음마저 경쾌해지는 가벼워진 옷차림, 저마다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 짙은 녹음과 나뭇잎 사이로 새어 나오는 따가운 햇살, 골목길에서 더운 공기와 섞여 흘러나오는 쿰쿰한 음식 냄새, 언제라도 환한 낮일 것만 같이 맑은 푸른빛의 하늘. 만끽했던 한국의 여름이 홍콩에서 연장되는 것을 느끼며 여행하는 내내 에너지가 넘쳤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한국의 4계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았지만, 베트남, 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여행할 때면 이렇게 열대기후가 있는 나라에 나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는 뉴욕 어학원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 미키를 만났다. 뉴욕에서 연말을 보내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한국에 놀러 왔다고 한다. 한국 관광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길래 어디서 보면 좋을까 고민하다 내가 좋아하는 북촌에서 보기로 했는데, 웬걸 눈이 많이 왔다.


눈 내리는 북촌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북촌 특성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많아 미끄러운 땅을 걸어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의 매서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미키는 한국이 뉴욕의 겨울보다 춥다며 it's cold를 연발했다. 우리는 미끄러질까 봐 팔짱을 끼고 조심조심 걸었고 내가 미리 찾아 놓은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가 몸을 녹였다.


내가 뉴욕을 떠난 후에 미키가 보냈던 뉴욕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구경하며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미키와 나는 어학원에서 같은 반은 아니었고, 학원에서 종종 수업 후 진행하던 액티비티 시간 때 처음 만났다. 볼을 핑크빛으로 곱게 물들인 일본식 메이크업을 한 미키는 밝고 친절했고 배려심이 많았다. 같이 재즈바를 다녀온 후 밤늦게 뉴욕 거리를 걷다 지하철 입구를 잘 못 찾아 헤맸을 때도 우리는 같이 까르르 웃으며 길을 찾아 나섰다.


뉴욕의 가을은 참 더웠고 우리는 가을에 맞지 않게 얇은 옷을 입고도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데 뉴욕에서 사 온 코트며 귀도리며 겨울 아이템으로 중무장한 미키의 모습과 그 뒤로 눈이 내리면 춥지 않다는 말이 무색하게 쌀쌀한 눈 덮인 서울 북촌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뉴욕에서의 일이 마치 1년 전쯤처럼 오래전 일인 것 같이 느껴졌다.


미키와 나는 커피와 케이크가 맛있었던 카페에서 한동안 수다를 떨다가 추운 북촌을 벗어나 여의도 더 현대로 갔다. 뉴욕에서 망가졌다는 미키의 핸드폰 케이스를 새로 사고 기념품으로 살만한 것들을 같이 둘러보았다. 미키에게 한국에서 핫한 브랜드와 패션 아이템을 구경시켜주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여의도 역에서 헤어졌다. 미키는 내게 '도쿄에 놀러 오면 꼭 연락을 달라'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고 우리는 포옹했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우리는 직업도 나이도 가치관도 뉴욕에 간 이유도 모두 달랐지만 반가웠고 즐거웠고 기회가 또 생기면 만날 것이다.


며칠 전 어학원에서 같은 반이었던 중국인 언니가 연락이 왔다. 설날 전 주에 한국에 놀러 온다고 했다. 뉴욕에서의 시간들이 이렇게 이어질 수 있음에 기쁘다. 올해 겨울은 지난겨울보다 좀 더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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