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서 먼 곳에 살긴 했지만,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막내를 대동하고 오실 만도 한데 한 번도 오시지 않았다. 아이들 돌잔치와 집들이 때 오신 게 다였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지키기로 결심한 듯 엄만 맛있게 담근 김치 한번 건네주신 적이 없었다.
난 네게 할 만큼 했다. 이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싸다. 그야말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마의 돌봄을 당연한 듯 받고 살았으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학교 다니거나 회사 다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자에 게으름뱅이였다.
지금처럼 유튜브가 없던 시절, 모든 요리를 요리책으로 배워야 했다. 암담했다.
이렇게 다 해야 하는 거면 진즉 가르쳐 주셨어야지, 참 엄마는. 엉뚱한 원망을 했다.
엄마는 내 성격과는 정반대. 엄청나게 부지런하신 분이다. 연례행사인 김장을 할 때도, 언제 후딱 해치우셨는지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항상 게임아웃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해본 내가 결혼해서 김치를 담그고 살림을 하려니 버거웠다. 엄마 생각이 절로 났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미숫가루를 먹어야 하는데 손이 덜 간다. 어릴 적 먹었던 엄마표 미숫가루가 생각나 오랜만에 샀는데 그 맛이 아니다.
무더운 여름날,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는 커다란 바가지 같은 데 미숫가루를 한가득 타놓고 기다리셨다. 그 위에 얼음까지 동동 띄우면 고소함과 달콤함에 기분까지 좋아지곤 했다.
그 시절 여름이란 미숫가루를 먹는 계절이었다. 엄마가 좋은 잡곡을 선별 조합해 직접 방앗간에서 빻아온 미숫가루는 특별한 날 만들어 주신 식혜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렇듯 음식은 오래오래 기억으로 남는 모양이다. 요즘 엄마 생각이 나는 음식은 시루떡이다.
우리 동네에서 찾은 맛있는 떡집에 들를 때면 먹기 좋게 1인분으로 포장된 시루떡을 고른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열세 살 생일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엄만 내 생일에 시루떡을 직접 만들어주시곤 했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작은 시루에 켜켜이 찹쌀과 팥고물을 올리고 시루번을 붙여 정성 들여 떡을 만들어 주셨다. 난 아마도 케이크를 사주길 기대했나 보다. 철딱서니 없이 ‘또 떡’이냐고 투덜댔다.
그런데 평소의 엄마와 달랐다. 먹기 싫음 먹지 말라고 뭐라고 한소리 하실 법한데, 왠지 분위기가 어두웠다. 내 생일인데 엄만 이상하게 느지막이, 마치 깜빡 잊은 듯 어둑해진 시각에 떡을 만드셨고, 그날따라 웬일인지 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조용한 한숨과 내 투덜거림이 부조화스럽게 느껴진 날이었다.
그 뒤로 엄만 떡을 만들지 않았다. 아니 만들 새가 없었다. 위태했던 아버지의 사업은 몇 달 지나지 않아 기울고 말았다. 부도가 나던 날 아침까지 아버진 당신이 융통할 수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위기로 치닫고 있던 1979년이었다. 집에서 살림하고 친구들과 친목계를 하며 가끔 여행도 다니던 엄마의 평온한 일상은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엄마는 다시 손을 걷어붙여야 했다.
그때 엄마 나이 고작 마흔둘. 내가 경력 단절을 끝내고 새롭게 일을 시작한 그 나이 무렵이었구나.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게 두려웠을 텐데 엄마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힘들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진짜 그런 줄 알았다. 무심한 딸이었다.
지금은 사무치게 엄마가 만든 뜨끈한 팥시루떡이 먹고 싶다.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그때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다.
엄마가 그날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 같다.
곧 위기가 닥칠 듯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그때, 그래도 정성을 다해 시루떡을 만들었다고, 모든 액이 물러가라고 어느 해보다 팥을 듬뿍 올려 시루를 안쳤다고, 너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떡을 만들었다고….
다음 요양원 면회 때 엄마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드려야겠다. 틀림없이 엄만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겠지. 말씀을 못하시더라도 눈으로라도 따뜻하게 바라봐 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