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말이다. 기차에서 보따리를 내리느라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늬 오빠한테 말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있더라.”
오빠가 다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울역 플랫폼에 세 식구가 발을 딛는다. 가난한 살림에 보따리에 뭐가 담겼을까. 고작해야 옷가지와 당장 덮을 이부자리가 전부였을 것이다.
엄마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끊어내려 상경을 결심한다. 아버진, 몸이 약하신 할머니와 한량인 할아버지, 그리고 줄줄이 다섯이나 되는 동생을 두고 고향을 떠날 만큼 모진 사람이 아니어서 미적댔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내려면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엄마의 결단으로 우리 가족의 서울살이가 시작된다. 나는 엄마 뱃속에도 없던 때였다.
몸이 부서져라 성실하게 일하는 아버지 덕분에 살림은 조금씩 불어갔고 오빠의 동생들이 두 살 터울로 태어난다.
엄마는 자식만큼은 제대로 교육시키고 싶다는 신념이 강했다. 특히 큰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학군이 좋은 데 살아야 유명한 중학교,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기꺼이 필동에 사는 친척집에 오빠를 맡긴다. 초등학생을 말이다. 서울 시내 중심지로 비싼 유학을 보낸 셈이다. 주변에 극장이 많고 놀거리가 많은 동네에서 오빤 아마도 친척 형과 신나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무렵에야 오빠와 같이 살게 됐다. 대신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2시간 거리를 오빠는 매일 통학해야 했다.
새벽녘, 엄마가 맛있게 밥상을 차려 오빠에게 어서 먹으라고 한다. 오빤 밥맛이 없다고 몇 술 안 뜬다. 엄마는 입이 짧아서 어떡하냐고 안타까워한다. 나는 이불 속을 빠져나오지 않은 채 모자가 나누는 똑같은 대화를 매일 아침 듣곤 했다.
엄마의 기대와 달리 오빤 예비고사 성적이 잘 안 나온 듯했다.아버지 사업이 무너지자 운전병으로 지원해 군대에 가버린다. 우리집 차를 운전하려고 딴 자동차 면허증 덕분이었다. 장기집권한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1979년이었다. 엄마는 겨우내 오빠 걱정을 했다. 추위도 많이 타는데 어떡하냐고. 오빠는 굳은 결심을 한 듯 3년 내내 외박 한 번 나오지 않았다.
제대하고 난 뒤 오빠와 마주 앉은 어느 날. 복학할 거냐고 묻는 내 말에 오빤 고개를 저었다.
"돈 벌어야지."
일하러 나가겠다고 했다.
“버스에 타면 말이야. 사람들이 다 나를 피해. 혹시나 나한테 뭐가 묻을 듯이….”
작업복 차림의 오빠가 낯설었지만, 우리집 형편을 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오빠의 표정은 쓸쓸했지만 단단해 보였다.
그 뒤로 오빤 취업을 했고 결혼한 뒤엔 아버지의 사업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모든 게 안정적이라고 생각되던 때 갑작스레 캐나다로 이민을 가겠다고 선언한다. 엄마를 닮아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선지, 조카에게까지 눌어붙는 작은아버지들과 무거운 장남의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모른다.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떠난 지 1년 4개월 만에 오빠가 다시 왔다. 엄마가 병원에서 퇴원한 지 두 달이 지난 때였다. 좀 더 빨리 오지, 하는 원망의 시간들이 조금씩 희미해져 갈 무렵이었다. 다행히 엄마는 빠르게 회복됐고 동생과 나는 매주 엄마를 만나면서 조금씩 안도했다.
1년여 전과 달리 엄마는 당신의 특별한 자식, 큰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힐끗힐끗 얼굴을 살피느라 자꾸 얼굴을 돌렸지만 낯선 모양이다. 오빠는 두 달 일정으로 왔는데, 안타깝게도 같은 건물에 있는 요양원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그다음엔 엄마가 코로나에 감염되는 바람에 몇 주간 면회가 중단됐다. 오빠가 돌아갈 무렵에야 엄마는 아들이라고, 아들 맞다고 하셨다 한다. 오빠와 올케, 둘만 면회를 한 날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단다. 열이 나는 건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오빠는 걱정했다. 요양원 원장은, 엄마가 아드님을 알아보셨다면 아마도 당신의 현재 상황이 자각되면서 혼란스러운 느낌 때문에 그리 표현하신 게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으리라.
오빠가 떠나기 전 우리 삼형제와 올케, 이렇게 넷이 포항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오빠를 위한 추억여행이기도 하다. 군대에 있던 3년간 머물렀던 곳, 40여 년 만에 구룡포 땅을 밟는다 했다.
오빠의 군대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며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때였다.
엄마가 병원에 계셨을 때, 그리고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퇴원하셨을 때, 정말 힘들었다고. 오빠가 바로 올 수 없다고 해서 원망스러웠다고….
긴 위로의 말도 못 하는 오빠가 짧게 대꾸하며 술잔을 채워 준다.
“그래서 왔잖아~”
오빠도 괴로웠다고 한다. 괴로웠지만 엄마를 생각해 단 한 잔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한다. 아니, 마실 수가 없었다고 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원망스러운 마음을 떠나보냈고, 시원한 바닷바람에 섭섭함들을 털어버렸다.
“야, 다음에 캐나다로 다들 와. 밴쿠버에서 알래스카로 가는 크루즈가 있거든? 그거 한번 타자.”
“그래? 좋아.”
나는 웹사이트에서 크루즈를 찾아보며 그 멋진 배를 배경으로 서 있는 우리 사형제를 상상한다. 그새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