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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Dec 04. 2023

그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친구들이었다

직접 그린 70여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

하얀색 도화지를 접어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쓱싹쓱싹 밑그림을 그리고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색칠한다. 속지엔 짧게 인사말을 적는다.  

할 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미리미리 준비한다고 했는데 늘 그렇듯 마감날 완성률이 제일 높을 것이다.

초저녁 잠이 많은 엄마는 한숨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뭔가를 만들고 있는 내게 어서 자라고 성화다. 10분 간격으로 내방 문을 열어보는 듯하다.


그래도 끝내야 한다. 방학식날 우리 반 친구 모두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줄 계획이니까. 그때 난 초등학생 시절을 마감하는 12월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런 무모한 계획을 세웠을까. 우리반 친구라면 70명이 넘는데 말이다.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으면 카드를 사서 줘도 될 텐데 어쩌다 직접 만들겠다고 생각했을까.

큰돈이 들긴 하겠지만 엄마 몰래 아빠에게 잘 얘기하면 받아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난 그때 문구 덕후였다. 우리 동네 문방구의 일등 공신이었다. 반짝이는 신제품은 물론 제일 예쁘고 비싼 공책, 수첩, 크레파스, 사인펜 등을 사모았다.

크리스마스 시즌엔 매일 쏟아져 나오는 카드를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주말이면 친구들이랑 큰 문구점을 찾았다.

하얀 눈이 덮인 전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평화로운 들판, 크리스마스 선물을 싣고 달리는 사슴과 인자한 미소의 산타 할아버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옷을 입고 있는 미키 마우스, 깜깜한 밤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외따로이 있는 집에선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는 풍경….


홀린 듯이 몇 장의 카드를 손에 들었다가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보고 그리는 건 제법 잘 그리니 친구들에게 줄 카드를 내가 직접 만들면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엔 나랑 친한 몇몇 친구들만 꼽다가 그래도 반장까지 했는데, 우리반 친구 모두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겠지.

이왕이면 서로 겹치지 않는 그림의 카드를 주려고 아마도 엄청나게 많은 그림 샘플들을 모았을 것이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반장을 한 것은 순전히 엄마의 ‘와이루’ 덕이다. 일본말인데, 그땐 선생님에게 주는 촌지를 그렇게 불렀다.

5학년 담임과 6학년 담임이 친해서였을까. 나에 대해 어떤 정보가 닿았는지 학기 초 느닷없이 반장이 됐다.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지만 1, 2등을 다투는 정도는 아니었고, 줄반장이나 했을까 임원을 해본 경험이 없는 내게 담임이 반장을 하라 했다.

무척이나 내성적이고 친구도 많지 않은 내가 반장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안 할 도리가 없었다. 안 하겠다는 말조차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아이였으니까.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담임이 들어오기 전 아침마다 교실은 난장판이었고, 어떤 애는 내게 다가와 반장이니까 아이들을 조용히 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억지로 이끌려 교탁 앞으로 나갔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릴 리 없다. 어떻게 할지 몰라 식은땀만 났다.

학급회의 시간은 더 죽을 맛이었다. 주어진 형식에 맞게 회의 진행을 해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그 말투가 영 입에 붙지 않았다. 누군가 엉뚱한 소리를 할까 겁이 났고, 다른 의견들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미리 걱정했다.


그러나 반장 그게 뭐라고, 천천히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 친구들도 많아졌다. 조용히 하라는 말도 못 하던 내가 자율학습 시간에 앞에 나가 친구들과 시험 대비 문제풀이를 하며 함께 공부했다. 반장이니까 잘해야지 싶은 생각에 성적도 조금 오른 것 같다.


2학기엔 다른 아이가 반장이 됐는데도 담임은 주기적으로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담임이 “어머니 요즘 바쁘시니?” 하는 질문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난 그대로 엄마에게 전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이상하게 한숨을 쉰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만, 담임들에게 1년에 한두 번, 인사하러 갈 때 성의 표시를 했을 뿐인데 6학년 때 담임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말할 수 없이 모욕적이었다. 그게 반장의 대가였나 싶었다. 엄마가 나중에 선생님이 되라고 했을 때 콧방귀도 뀌지 않은 건 그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시절이었다.




이 모든 내막을 알 리 없는 그해 12월. 난 어느 해보다 눈부셨던 초등학교 6학년을 돌아보며 나만의 ‘빅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그리고 기어이 해냈다. 방학식날 반 친구 모두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돌렸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가며.

나를 성장시킨 친구들이 정말 고마웠다.


친구들을 생각하며 특별한 말을 카드에 담고 싶었지만 작업의 분량상 아마도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를 쓰기도 바빴을 것이다.

그래도 한 친구도 빠뜨리지 않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우리반 친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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