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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Nov 20. 2023

겨울 코트의 추억

더플코트가 부러웠지

브런치에 매주 글을 올린다. 월요일 아침, 카페로 향하면서도 어떤 글을 쓸지 미리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즐겨 찾는 자리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천천히 먹으며 그제야 생각한다. 대부분은 순조롭다. 반드시 글을 완성해야 하므로 어떻게든 쓴다. 카페의 분위기에 따라 체류시간이 달라지긴 하지만 ‘발행’ 버튼을 누르고 일어설 때의 느낌은 늘 좋다.


오늘 글은 예외다. 어젯밤에 우연히 오른 글감이다.

시작은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었다. 4화에서 사라진 김치양을 연기한 배우를 검색하다 그 배우의 인스타까지 가게 됐다. 모델인가 보다.

“겨울을 기다리게 만드는 코트”광고한다.

겨울 코트라. 문득 겨울 코트에 얽힌 씁쓰레한 올랐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1월 4일 전면적인 두발교복 자율화를 발표한다. 몇 달 이었으니 아마도 1981년 11중순 무렵이었을 것이다. 고1 겨울, 추위가 성큼 다가온 어느 날. 엄마가 교복 코트를 사러 시장에 가자 했다. 교복은 맞추는 건데, 아니 왜? 난 우리집이 망했어도 이렇게 철이 없었다.


아무튼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따라나섰다. 아마도 평화시장인 것으로 기억한다. 즐비한 옷가게에 들어갔다 나오길 몇 차례. 맞는 코트가 없었다. 난 평균 이상으로 키가 컸다. 반에서 맨 끝번호거나 그 앞번호였으니. 키에 맞추면 옷의 품이 너무 컸다. 어떤 걸 입어도 마찬가지였다. 옷감의 품질도 하나같이 맘에 안 들었다. 모직 흉내만 냈을 뿐 하나도 따뜻하지 않을 것 같았다. 웬만하면 중학교 때 입었던 코트라도 입고 싶은데, 콩나물처럼 15cm 이상 커버렸으니 중1 때 아무리 크게 맞췄어도 맞을 턱이 없다. 결국 키에 맞춰 아무거나 샀다. 아마도 내 입이 댓 발이나 나왔을 것이다. 엄만 겨울 한철 입는 옷이니 커도 괜찮다고 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아예 사지 말걸. 어느 날 학교에 코트를 입고 갔다가 친구들이 언니 꺼 입고 왔느냐는 얘기를 듣고 얼굴이 빨개져버렸다. 아마도 집에 와서 애꿎은 코트를 벗어던졌겠지.  

그 후로 웬만하면 코트를 입지 않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데도 최대한 버텼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추운 날을 대비해 셀프 수선했다. 전체 품은 손도 못 댄 채 손바느질로 가슴선 정도만 줄이는 거였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 보였다. 세탁소 수선이라는 걸 맡겨 본 적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코트를 입어야 하는 날엔 최대한 일찍 등교했다. 교실에선 코트를 벗어도 되니까. 어울리지 않는 코트를 입은 내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못 사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몸과 마음이 추웠던 그 겨울에 교복 자율화 소식을 접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나같이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애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교복 외에 다른 옷을 구입해야 한다는 의미이므로. 엄마에게 또 다른 부담을 주는 일이므로.


교복 자율화 이후 처음 맞은 겨울. 웬만큼 사는 집 애는 더플코트를 입고 학교에 나타났다. 지금도 생각난다. 친구 A의 진베이지색 더플코트. 그 친구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사실보다, 엄마가 약사라는 사실보다, 그 친구가 입은 더플코트가 부러웠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는 포기가 빠르다. 엄마가 새로운 코트를 사줄 리는 만무하고, A보다 공부나 더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대학 졸업하고 잡지사에 다닐 때였다. 영업부에 근무하는 B는 한겨울에도 양복 차림 그대로였다.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15분은 걸어야 했는데, 다소 왜소한 체구의 는 늘 코끝이 빨개진 채 출근하곤 했다.

“안 추우세요?”

다들 한 마디씩 했다. 그럴 때면 B는 하나도 안 춥다고 거짓말을 했다. 몸을 바르르 떨면서 안 춥긴….


그 추위를 아는 나는 일부러 못 본 척했다. 변변한 겨울 양복도 없는데 코트를 어떻게 장만하랴. 모르긴 해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그가 기본급에 실적 수당이 붙는 월급으론 코트 한 벌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떼어 부모님 생활비로 보태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다음 해 겨울, B는 괜찮은 겨울 코트를 걸쳤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의 따뜻한 겨울을 축하했다.

말 많은 조직에서 남의 눈 따위 생각하지 않는 B가 잘 버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얘기를 나눈 적도 없는 B를 응원한 건 아마도 힘들었던 그 시절의 내가 불쑥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유난히 잠이 많던 내가 학교에 일찍 가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속바지를 몇 개씩 껴입으며 안 추운 척하려고 얼마나 애썼을까. 가뜩이나 삶의 무게가 버거운 엄마에게 ‘배부른 소리’를 할 순 없으니 그렇게라도 견뎠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마음을 썼던 건, 어쩌면 숨기고 싶은 가난의 그림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라도 토닥토닥 위로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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