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린 건, 아들 녀석이 내게 엄마 할머닌 어떤 분이셨냐고 물어봐서였다.
“할머니? 완전 특이한 분이셨지. 오랜만에 찾아온 손자 손녀들을 전혀 반기지 않으셨어. 하하!”
설마 싶지만 그랬다. 할머닌 기나긴 겨울 방학을 맞아 내려온 손주들에게 반갑다고 미소를 짓거나 안아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심란한 표정을 지으셨고, 어찌할지 몰라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계시곤 했다.
쟤들에게 뭘 해먹이나, 대체 언제 가려나…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 할머니가 나를 찾으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보고 싶다고 하셨다던가. 아버지가 한번 다녀오지,라고 말씀하신 듯했지만 못 갔다. 결혼한 뒤엔 직장 다니느라 바빴고, 그다음엔 아이 기르느라 정신없었다. 사실 할머니가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뵙고 오라는 아버지의 마음이려니 생각했다. 할머닌 평생 당신의 사랑을 표현한 적이 없으니 보고 싶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한번 찾아뵐 걸….
그래도 첫 손녀라고 내겐 특별히 대해 주셨는데, 다른 손주들 몰래 숨겨둔 곶감을 꺼내 주곤 하셨는데….
할머니는 평생 골골하셨지만 여든둘에 돌아가셨다. 그나마 할머니가 건강해지신 건 아버지가 사다 나른 사골과 쇠고기 등 보양식 덕인지도 모른다.
“집에 안 들어와서 걱정하고 있으면 시골 다녀왔다고 하더라.”
집 전화도 없던 시절, 엄마는 그렇게 말도 없이 시골집에 다녀오는 아버지를 타박했지만, 엄마의 잔소리를 먼저 듣는 게 싫어선지 아버진 그 후로도 쭉 사후보고만 했다.
할머니는 연세가 드실수록 건강해지는 듯했고, 시골집엔 최신 가전제품이 하나둘 늘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 걸까.
엄마는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할머니한테 혼난 일을 두고두고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좋은 기억이 없을 듯싶다. 부엌에서 멍석을 깔고 밥을 먹다 된통 혼났다고, 제사 때 쓰는 걸 꺼냈다고 할머니가 뭐라 그랬다나. 좀 다정하게 대해 주실 것이지. 오죽 방이 비좁으면 부엌 한쪽에서 옹색하게 앉아 밥을 때우려 했을까.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할머니가 큰일 날 듯 소리를 지르셨으니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린 엄마는 무척이나 서러웠을 것이다. 줄줄이 다섯이나 되는 시동생, 세 살밖에 안 된 꼬맹이 시동생까지 챙기느라 숨 돌릴 틈도 없이 동동거린 나날들을 생각하며 눈물이 쏟아졌을 것이다.
난 할머니를 유독 손이 작았던 분으로 기억한다. 한겨울 시골에서 먹을 간식이라곤 고구마밖에 없다. 내가 대표로 가서 군고구마 해 먹게 고구마 주세요, 하면 할머닌 창고에서 고작 네댓 알을 꺼내 주시곤 했다.
“아니 할머니,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요….” 이러면 할머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듯 웃으시다가 딱 두 개를 더 얹어 주시곤 했다. 워낙 궁핍한 살림을 살았던 때문인지 할머니에게 뭔가를 더 얻어내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었다.
몸이 안 좋아 집안 살림을 거의 안 하셨지만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특별한 음식들 몇 가지는 지금도 기억난다.
할머니는 찹쌀과자인 산자를 아주 잘 만드셨다. 기름에 닿자마자 놀랍도록 크게 부풀어 오른 뜨끈한 산자에 튀밥 고명을 묻히면 바삭함과 고소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쑥개떡도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가 시커먼 손으로 죽죽 늘여 떼어준 쑥떡을 건네받을 땐 께름칙했지만 향긋한 쑥향과 씹는 맛이 좋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건 보리순된장국. 이건 우리집에서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이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풀같은 게 보리순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 생각을 하던 차에 한살림에서 보리순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보리순 된장국에 도전해 보았다.
결과는 땡! 그 맛이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보리순은 이렇게 부드럽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일단 비주얼부터 다르다. 게다가 보리순을 넣고 바로 불을 껐어야 했는데 질겨졌다. 결정적인 건 역시 된장. 시골 항아리에서 꺼낸 집된장이 아니어선지 깊은 맛이 없다. 아, 이건 할머니 아니면 끓일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 음식이구나 싶다. 아쉬웠다.
사실 어릴 적 난 시골이 너무 싫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밤이 무서웠고, 금방 간다며 십리 이상 걷게 만드는 장날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어느 여름, 아마도 오빠랑 같이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은 덥고 밥상엔 달랑 열무 물김치와 고추, 그리고 된장이 보인다. 할머니도 참, 계란 프라이라도 해주시지….
그런 맘을 할머니가 알 리 없다. 나도 응석 부릴 나이가 아니니 그냥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열무 물김치는 괜찮았다. 풀국이 들어갔는지 시원하면서 깊은 맛.
나이가 드나 보다. 별것 아닌 그 맛들이 그리워진다. 마음은 어느새 그 시절 그 툇마루, 무뚝뚝한 할머니가 빤히 보고 계실 것 같은 그 시골집에 가 있다.